먼 숲에서 오솔길까지

초록바람을 마음에 담다

먼 숲 2008. 5. 18. 15:33

 

       

       

            

       


       

       

      오월로 들어선 초입, 그날따라 하천을 따라 흐르는 골바람이 급류처럼 거세다

      한 차례 단비가 내린 오월의 숲은 독이 오른 듯 초록으로 짙어져

      수런거리던 많은 봄의 이야기를 흔적도 없이 지우고 있다

      서쪽에서 부는 바람은 궁륭을 이뤄가는 나무들의 허릴 굽히게 하며

      강물을 따라 싱그런 초록바람으로 골짜길 따라 흘러 내리고

      긴 둑방길을 덮은 풀들이 두 자씩은 자라 풀섶을 이루며

      바람이 불적마다 초록 너울로 일렁거려 마치 밀밭길을 지나는 것 같다

      초록은 시시때때로 짙어지고 무성해져 오늘 내일의 자리가 다르다는 걸 느끼며

      나는 폐부를 맑게 하는 오월의 푸른 바람을 안으며 자전거 패달을 힘차게 밟는다

       

      이른 봄부터 하천을 따라 오가다 보니 봄은 참 쏜살같이 지나간 거 같다

      갈색에서 연두로, 연두에서 초록으로 바뀌는 산빛의 변화로 가늠하던 봄의 시간이

      둑방길을 따라 피고 진 벚꽃의 화려한 축제를 고비로 순식간 자취를 감추고

      초하의 그림자가 산자락을 이끌고 물속까지 내려왔다

      지나는 길가에 핀 오동꽃이 지더니 하얀 찔레꽃과 덩굴장미가 장벽을 치고 피어나고

      산등성이마다 군데군데 아카시아꽃이 집성촌처럼 하얀 꽃구름을 이루고 있다

      푸른 둔치를 지날적마다 잔디밭가로 하얀 토끼풀이 무더기로 꽃을 피워

      은은한 꽃향기가 빠르게 지나는 내 시선을 유혹하며 자꾸 주저앉히려 한다

      마냥 풀밭에 누워 오월의 신록을 마주하며 마음은 흐르는 구름을 따라가고 싶다

       

      이제 내 마음밭은 황폐해져 꽃도 피우지 않고 이슬내리는 풀섶도 없다

      몇 해 째 버려진 묵정밭이 되어 가난하던 마음이랑마져 뭉개지고

      오가는 사람없어 혼자 걷던 호젓한 마음길마져 흔적을 지우고 있다

      경작하지 않는 마음밭은 잡풀만 무성해지고 가시덤불로 엉켜

      점차 폐쇄되고 퇴락해지고 있으니 마치 버려진 폐가처럼 보인다

      그나마 출퇴근길의 틈새 시간에 내다보는 마음의 창을 통해 초라해진 자신을 비춰보곤했는데

      그 시간마져 곤곤한 일상에 잠식되어 버렸고 감성은 병든 닭처럼 꾸벅꾸벅 졸고 있다

      이젠 도약이나 변화같은 동적인 행동은 포기하고 쉬고 싶단 생각이 자주 든다

      아직 쉴 형편이 아님을 확연하게 알면서도 그런 생각이 드는 건 사는 데 꾀가 난 모양이다

      실직의 두려움이 암세포처럼 자라나 언제 발병할지도 모르는 처지에

      지금의 바쁜 하루를 감지덕지 해야 하건만 오십이 지나니 공연한 게으름만 자란다

       

      가끔 우울처럼 도지는 상심의 계절을 견디며 만나는 봄은 내게 보약처럼 기를 살려 주었다

      이만큼 살았으면 적당히 타향살이에도 길들어져 회색빛 생활에 젖어 있을만도 한데

      살수록 푸르고 맑은 자연이 그리워지는 건 사람도 자연의 일부라서 그런 거 아닌가 생각한다

      잠시 점심시간을 틈 타 하천을 따라 자전거를 타고 가면서 보는 골짜기의 푸르른 풍광은

      얼른 모든 걸 접고 숲이 숨쉬는 시골로 돌아가고 싶다는 소망을 품게 한다

      잃어버린 고향을 찾아 다시 마음밭을 일구고 싶은 생각이 구름처럼 가득해진다

      근래 도종환 시인의 『 그대 언제 이 숲에 오시렵니까』란 청정하고 푸른 산문집을 읽었다

      초록바람이 마음을 씻어주는 맑고 싱그런 글숲에 들게 하여 글을 읽는 동안 내내 행복했다

       

      도詩人처럼 귀향하여 살 수 있는 형편은 못되지만 내 마음밭에 푸른 푸성귀라도 자라고

      볕드는 앞마당엔 쉼없이 일년생 화초라도 키워 철마다 반가운 꽃을 마주하고 싶다

      마음의 오지엔 작은 암자도 하나 있어 어쩌다 산에 들어 바람같은 詩 한 수 읊을 수 있으면 좋겠다

      해마다 굳어가는 뻣뻣한 관절을 피할 수 없어 틈틈히 자전거 패달을 밟고 있지만

      그래도 아직 초록바람을 가슴에 안고 달리고 있으니 부족함이 없다 해야 할 것이다

      바람을 등지고 신나게 강을 따라 질주하다 보면 스치는 마음에 초록물이 든다

      남은 시간도 오월의 나무가 되고 숲이 되고 싶은 마음 간절하지만 현실을 벗어난다면 그도 욕심일게다

      그러나 더이상 황폐해져 사막화 되지 않게 마음의 변방에 울울한 방풍림을 만들어야겠다

      휴일 일터에서 잠시 글을 쓰는 오후, 하늘이 뚫린 듯 비가 쏟아진다

      간만에 내리는 단비이니 오월의 들녘도 내 마음밭도 해갈을 이룰 것 같다

       

       

       

       2008.5.18일.   먼   숲

          

      

 

 

 

  

 

 

  

 

<사진 블러그 Dreaming sappho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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