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가루가 날리던 사월이 지났다. 출근길마다 깃털처럼 가벼워진 꽃씨가 먼지처럼 날려와 얼굴을 스치며 날아갔다. 초파일 가파른 산길을 오르는 버스의 창 틈과 외우진 꼭대기 산신각 마루에도 은행빛 송화가루가 먼지처럼 쌓 여 있었다.이른 봄 꽃을 피운 나무와 식물들은 어김없이 자신의 꽃자리에 남아 씨방을 만들거나 홀연히 집을 떠나 새로운 터를 만들고 있었다. 오월로 들어서자 모든 생명체가 뿌릴 내리며 무성하게 자리매김을 해 나가는 모양이 평화스러워 보인다. 어제 신문을 보다 안도현 시인의 글귀가 민들레 씨앗처럼 날아와 내 마음에 내려 앉는다.
"씨앗이란 우리가 이 세상에 왔다 갔다는 걸 잊지 않기 위해 찍어두는 점이야".
온 산이 하얗게 아카시아 꽃이 만개하여 그 향기가 진동을 한다. 코 끝을 스치는 꽃향기를 맡을 적마다 자꾸 유년시절과 잃어버린 고향이 그립다. 내 유년시절은 산에 아카시아 나무가 많지 않던 때이다. 아카시아는 화력이 좋고 연기가 적어 겨울에 땔감으로도 좋지만 그 당시 오이덩굴을 올릴 지줏대로 쓰느라고 어른 키만 하게 자라면 모두 베어가느라 지금처럼 우거진 아카시아 숲이 없었다. 하기사 그 시절 맑은 공기 외엔 뭐 풍족한 게 없지 않았나 생각된다.
그래도 우리 마을 동구 밖이나 철길 가장자리엔 아카시아가 많아 학교를 오고 갈적에 후루루 꽃송이를 훑어 입에 넣고 그 단맛과 풋내를 배부르게 먹을 수 있었다. 시들지 않은 싱싱한 아카시아 꽃이나 솔내나는 송화꽃이 보리고개를 넘는 그 시기엔 또 다른 먹거리가 되기도 하였다. 오월의 숲이 점점 초록산으로 깊어가면 짝을 부르느라 온종일 뻐꾸기가 울어대고, 밤이면 개구리 소리가 요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그러한 것들이 이젠 되돌릴 수 없는 시간과 풍경이건만 문득 문득 초록의 계절이 오면 가난했던 유년의 감성들이 그리움이 되어 아카시아꽃 향기처럼 번져난다. 봄이면 꽃이 붉거나 노랗게 화려한 것은 잎이 피지않은 삭막함속에서 자신을 보이게 하기 위한 이유같았다. 반면 모든 잎이 무성해지면서 초록의 숲이 되는 초여름의 꽃은 거의 흰 꽃이다. 아카시아, 산수국, 이팝나무, 찔레꽃등 오월의 꽃들은 대부분 초록과 확연히 대비되는 하얀 꽃으로 벌과 나비를 유혹하는 것 같았다. 자연의 순리는 스스로 견디고 자랄 수 있는 지혜로움을 터득하라고 가르쳐 주건만 도무지 사람들은 모두 자신만 잘났다고 생각한다. 나부터도 그러한 어리석은 고집으로 실없이 남과 비교하며 자신을 학대하거나 스스로 벽을 쌓고 그 안에서 감금된 채 타협을 거부할 적이 많다. 무성하게 키운 고민의 가시덤불에 찔리면서 병들어 가고 있었다.
언제부턴가 우린 감탄사를 잊어버리고 있다. 저 창너머로 불어오는 아카시아 향기에 아! 하고 깊은 호흡을 할 줄도 모르고 작고 신비로운 들꽃이든지 눈부시게 아름다운 꽃빛에도 탄성을 지르지 못하는 불감증으로 굳어져 가고 있다. 얼마 후엔 감탄사의 의미조차 사장되는 것은 아닌지 모른다. 대신 요즘은 탄성 대신 여기 저기서 내 지르는 괴성의 범람속에 점점 엽기적이라는 이상한 쾌락의 늪에서 허우적이고 있다. 만족감에서 저절로 벙그러지는 감탄사가 아닌 불만족에서 터져 나오는 아우성으로 세상은 시끄러워지고 어지러워 지는 건 아닌 지 모르겠다. 사람이 살 수록 순화되고 정화되는 것이 아닌 오염되고 변이되어 가는 것 같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시골에서 흙과 같이 자란 나는 적어도 내 아이들은 밝고 해맑은 자연처럼 키우고 싶은 욕심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 이 시대는 그런 꿈을 완전히 무시해 버리게 하고 있다. 사는 곳이 그런 건겅하고 푸르른 자연이 아닌데 그런 생각을 한다는 것조차 어불성설임을 안다. 커갈수록 아이들은 밖을 싫어하고 고립된 안에서 사이버상의 친구나 게임과 친하게 지내고 있다. 변해가는 계절의 모습에 무감각한 것은 둘째이고 어쩌다 마주치는 자연의 아름다움에도 감동할 줄 모른다. 그런 아이들이 오장 육부를 뒤집히게 정신없이 돌아가는 놀이기구의 회전엔 겁없이 즐거워하며 괴성을 질러대고 있었다. 아이들은 건조해지고 굳어져 가고 있었다. 그런 모습이 지금의 현실 아닐까?
이젠 창문을 열어도 현기증 나는 오월의 아카시아 향기도 없고 길을 걸어도 풋풋한 풀냄새나 싱그러운 나무 냄새가 나지 않는다. 온통 벽처럼 둘러쌓인 아파트 숲에서 흙에 대한 추억은 응고된지 오래다. 이명처럼 들리던 달밤의 소쩍새 소리나 개구리 합창도 다시 들을 수 없는 잃어버린 소리의 향기다. 줄장미가 담장을 따라 꽃 울타리를 친다. 정원의 장미는 사발만하게 탐스런 꽃송이를 피워 올렸다. 오월을 월담하는 장미 향기가 이젠 사람들의 가슴까지 도달하지 못하고 시든다. 감탄하지 않는 마음 자락에서 아름다움은 흡수되지 못하고 증발되고 만다. 이 드라이한 디지탈의 시대에서 아직도 아날로그처럼 깜박이는 심장은 외롭다. 아 ! 오월의 기름진 초록은 깊어가는데 붉은 심장은 식어만 간다.
2003.5.20일. 먼 숲
■ 몇년전의 글인데 내가 좋아하던 글이다 아직은 감성이 시든 것 같지는 않은데 제작년부턴 글쓰기가 쉽지 않다 만족하지는 못해도 좋은 글을 쓰고 난 후의 행복함은 오래 지나고 난 후 내가 다시 읽어 볼 때이다 글쓰기에 게으른 건 무엇보다 사느라 바쁘고 여유 없다는 게 이유이기도 하지만 열정과 설레임이 식은 마음의 황폐함이 더 큰 이유일거다 똑 같은 일상에 옆을 볼 시간없이 살면서 점점 무감각해지고 무감동한 요즘 아무런 글을 쓰지 못하는 것이 살면서 더 삭막해 보인다
<사진 김선규 기자의 빛으로 그린 세상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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