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을씨년스런 사진은 가까이 사는 블러그 지인이 찍은 묵정밭 풍경이다 시골길을 다니다 보면 그리 낯선 풍경도 아니지만 막상 나도 처음 겨울 묵정밭의 저 사진을 대하곤 신비로웠다 동화속에 나오는 악마가 사는 가시덤불로 덮힌 정원 같기도 하고 드라큐라나 마녀가 사는 중세 유럽의 고성같은 으시시한 느낌도 들었다 때론 에밀리 브론테의 폭풍의 언덕 풍경 같아 바람과 함께 히스클리프가 유령처럼 저 숲에서 나타날 것 같기도 하다 그런데 작년 가을 안양천 자건거길을 따라 상류쪽으로 가다보면 저 사진처럼 개천변에도 마른덩굴이 나무를 뒤덮은 채 군데군데 움막처럼 진을 치고 있어 금방 원시인들이 돌도끼나 창을 들고 그 안에서 나올 것 같은 상상을 하곤 했다 이렇게 하나의 풍경이 다양한 상상과 생각을 하게 하는 재미가 있어 사진을 옮겨왔다 나는 요즘 날마다 안양천을 따라 자전거를 타고가다 저 사진속의 풍경을 보면서 또 다른 생각을 했다
그것은 마치 포신을 위장포로 감추고 적진을 향해 대립해 있는 대공포진지나 포병진지 같은 긴장감과 공포감이 들기도 하면서 곧 발사! 하는 붉은 깃발의 신호에 따라 포문을 열고 화염과 포성이 들릴 것 같은 환상이다 그런 생각이 드는 건 젊은날 일년동안 최전선인 GOP에서 근무한 기억때문인가 보다 그래선가 새삼 어둠이 내리면 무서운 정적과 함께 공포스럽던 국경의 밤이 생각나기도 한다 벙커속의 창을 통해 내다보는 비오는 야전의 쓸쓸한 풍경도 그립고 대대OP를 뒤덮은 아카시아 향기속에 들려오던 먼 포성소리도 그립다 힘들고 더디던 시간들도 아주 멀리 지나쳐 아득해진 지금 묵정밭을 둘러 싼 폐허같은 풍경의 사진 한 장이 뜬금없이 옛 추억을 생각하게 하고 아득했던 시간도 정겹고 그리웁게 한다 어쩌면 악몽같은 기억이 아닌 모든 기억들은 세월이 지나면서 퇴색하고 정화되면서 그리움의 덧칠을 한 채 새로워지는가 보다
차곡차곡 쌓였던 기억의 창고에서 묵은 사진 한 장을 꺼내 보듯 오늘 본 묵정밭의 풍경은 기억의 회로에서 푸른 빛을 내며 깜박거린다 공습경보도 없이 봄은 버려진 묵정밭 깊숙이 침투했고 이미 숨겨진 포신 속에서 겨울동안 장전되었던 녹슨 방아쇠가 당겨진 순간 포문을 열고 발사된 표적마다 봄꽃의 향기로운 화염이 진동을 하고 포탄을 맞아 분화구처럼 패인 반세기의 세월속에도 풀빛이 짙어간다 퇴역장병이 되어 일선에서 물러난지 오래되었지만 아직도 전방에 서 있던 푸른 제복의 시절을 생각하면 봄이다 그렇게 각개전투를 하듯 적진을 향해 달리던 패기가 인생의 봄이 아니었던지 진달래 흐드러진 칠부 능선에 누워 흐르는 구름을 본다 이제 저 묵정밭에도 여름이 오고 숲은 어두워질 것이다 나도 카멜레온처럼 변신을 꿈꿀수는 없는 건지......
2008.4.16 일. 먼 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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