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간 밤 비가 내린 새벽엔 아버지는 저 논길을 따라 물고를 보러 나가셨고
해지는 저녁엔 집채만한 꼴짐을 지고 저 논길을 따라 돌아 오셨을 것이다
나는 지금 기억에도 없는 아버지의 모습을 환상처럼
저 논배미 가득 찰랑거리는 그림자속에서 찾는다
나를 앞 서 가는 아버지라는 큰 그림자를 따라 길을 가지 못한 나는
혼자 길을 내고 내 그림자를 만들며 가야 했다
푸른 신록처럼 자라던 성장기엔 대문 앞에 서서
물끄러미 꼴지게를 지고 소를 몰고 가는 아버지나
삽으로 뒷짐을 짚고 논두렁길을 가는 아버질 그리워했다
아무리 어머니가 억척스레 농삿일을 하신다 해도 아버지가 해야 하는 일이 있었다
그 빈 자리가 농삿일에는 내가 살아내야 할 세상처럼 넓어 보였다
내가 커가면서 새벽에 물꼬를 보거나 지게질을 하며 어른 흉내를 냈지만
마음속으론 기침을 하며 대문을 들어서 마루에 앉아 계신 아버질 그리워했던 것 같다
다른 집 사랑방 댓돌에 놓인 19문 반의 흰 고무신을 보면 듬직하고 부러웠다
흰 고무신은 그 집을 태우고 가는 배처럼 보였고 집을 지켜주는 든든한 수호신처럼 보였다
성장기에서 아버지의 부재는 나를 작고 편협한 마음으로 자라게 했다
등 뒤에서 지켜 줄 사람이 없기에 애비없는 후레자식이란 욕 들을 일 없이
남들보다 더 조심스럽게 소극적이고 착하게 사는 방법을 택하게 했다
헛간이 기울고 대문의 문설주가 뒤틀리며 쓰러져 가도 겨우 기둥을 받쳐 놓았을 뿐
오랫동안 반듯하게 고치지 못하고 기울어 가는 가세처럼 눌려 살아야 했다
그래선가 아버지의 부재로 인해 혼자 우는 여자의 슬픈 일생을 먼저 배웠다
모두 넉넉치 않은 세월을 살던 때라 가난은 큰 어둠이 아니였지만
힘있던 가부장제도하에서 아버지의 부재는 그늘이고 기를 펴지 못한 위축감이였다
이젠 내가 아버지가 된지 오래 되었고 지난 과거를 함묵하고 살지만
아직도 내게 드리워진 그늘과 아버지의 그림자는 왜일까
추억에도 없는 아버지의 그림자가 강물이 드는 수로를 따라 내게로 온다
일몰의 그림자처럼 저무는 아버지의 등 뒤가 노을빛처럼 아련하다
어느덧 내가 아버지란 등짐을 지고 집으로 향하고
아이들은 아비의 어깨를 훌쩍 넘는 꽃다운 나이가 되었다
이 다음 그 애들은 아버지의 무슨 추억을 그리워할까
내 그늘을 되물림 하지 않기 위해 밝게 키운다 했지만
내가 그 애들에게 넉넉한 사랑과 힘을 주고 의기소침하게 기를 꺾진 않았을까
세상이 풍요로운 물질만능 시대라 아쉽고 모자라는 것 없이
넘치게 키우는 근래의 자식사랑 앞에서 넉넉치 못한 부모는
자식 뒷바라지 하기엔 턱없이 힘들고 허망하기도 한 요즘이다
점점 병든 부모가 짐이 되어 등 돌리고 노인들의 외로움이 어둠처럼 깊어진다
자식들 마음이 달라지는 것도 있겠지만 변화된 사회문제가 더 큰 영향을 준 것 같다
이 시점에 내 고루한 그리움은 지워야할텐데 어리석게도 멀지 않은 옛날을 회상한다
삶의 일상은 흐르는 물속에 어린 물그림자처럼 세월에 따라 지워지고 변한다
나는 지금 풍요로운 세상을 일궈주던 농경사회의 아버지를 추억하고 있지만
오랜 세월 지나 내 딸들은 날마다 직장만 오가던 아비의 무엇을 추억할까
기껏해야 늦은 학원길이 걱정되어 어둔 밤길을 마중나와
기둥처럼 우뚝 서 있던 아비의 긴 그림자나 기억하지 않을까
벌써 한 세대와의 격차는 먼 거리감이 생기고 사고의 틀이 달라
아비의 걱정과 잔소리는 말로 설명이 되지 않는 벽처럼 느껴진다
그래도 이 다음 그 애들의 삶에 아비의 그림자가 푸른 나무숲 같았으면 좋겠다
마음 흔들리고 갈림길에서 서성일 때 그 애들의 빛이 되었으면 좋겠다
초록을 여는 푸른 아침이 앞질러 오고 짧은 일몰의 시간이 곱다
지금은 빛과 물과 바람이 풍성한 유월, 내 마음의 들녘도 푸르다
오래 전 내 아버지들처럼 푸른 모가 무럭무럭 자라는 논길을 따라
휘적휘적 그리움의 바람을 일으키며 백로처럼 여유롭게 걷고 싶다
얼른 내 아이들이 훌륭히 성장하여 당당히 거친 세상 앞에 서고
나는 밀감빛 노을이 물든 저문강에서 지친 노동의 삽을 말갛게 씻고 싶다
2008.6.9 일. 먼 숲

<사진:블러그 Dreaming sappho에서>
■ 이 글을 쓰면서 내내 정희성 시인의 "저문 강에 삽을 씻고" 란 詩를 마음으로 노래했다
아울러 늘 내 글의 영감을 자극하는 사진을 제공해 주신 사포님께 감사 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