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이 혼자 떠도는 나그네가 아니다 보니 동행의 발걸음에 행보를 맞추노라 눈에 들어차는 시선의 몰입을 뒤로 한 채 앞으로만 갑니다 때론 멈추어서 넉넉히 바라보거나 거릴 두고 시공을 초월해 아픈 哀史의 주인공이 되어 그 한을 유추해보고 싶었던 영월입니다. 비운의 왕을 향한 애틋한 마음이 그 앞을 지키는 소나무의 충절로까지 이어져 청청한 노송이 모두 무덤으로 향해 비스듬히 머릴 숙이고 있었습니다. 지나쳐 가는 마음에 관음송의 기울움이 자꾸 내게로 그 그림자를 드리웁니다.
긴 가뭄에 청령포를 따라 흐르는 앝은 강물의 바닥이 드러나며 하얗게 백사장처럼 아득한 세월의 한자락을 드러냅니다. 유배지에서 바라보는 세월의 모습 또한 허무하건만 권력을 향한 욕심의 싸움은 예나 지금이나 여전한 반복의 역사인가 봅니다. 권력에 눈이 멀어 나이 어린 왕을 절해고도처럼 외우진 첩첩산골의 섬에 고립시킨 비정함에 저 산은 얼마나 외로왔을까요. 굽이 굽이 흐르며 돌아치는 강줄기는 그러한 한의 물굽이인지도 모릅니다. 그 그리움과 한이 흐르는 강물위로 하얀 찔레꽃잎이 눈물처럼 하염없이 흐릅니다. 저녁노을조차 산이 높아 산자락에 걸쳐지지 않는 산골입니다.

어둠처럼 웅크린 靑山 아래서 유난히 애절한 소쩍새 소리에 가슴 에이면서 산그림자 흐르는 앞강을 거닐며 물새처럼 아득한 그리움의 긴 목을 늘여 보았습니다. 고요하게 수평선을 이룬 강줄기를 따라 잔잔히 흐르는 물살을 보며 흘러가는 시작과 끝의 인과관계를 들여다 보는 저녁이였습니다. 초승달이 청령포의 물굽이처럼 처량했던 칠흙같은 밤을 보내고 방절리 서강을 뒤로한 채 동강을 향해 산굽이를 돌아갈 적마다 바라보는 곳 어디 한 군데 초록이 아닌곳이 없는
짙어가는 유록의 계곡과 산맥을 따라 흐르는 신록의 숲입니다. 청록의 신선함 속에 길가의 하얀 산수국과 찔레꽃으로 눈맞춤했습니다.
스치는 산맥와 마주보고 있는 순간들은 질릴 정도로 푸르른 신록의 강물에 빠져 무상하게 바라만 보게 할 뿐 사진처럼 어느 한 지점을 포착할 수 없는 풍경이였습니다. 영월서 돌아와 기억하는 필림속에서 영화속의 파노라마로 흐르는 유록의 산이
이제 다시 접할 수 없을 것 같은 아쉬움으로 가로막습니다. 내년에도 그 후에도 청산은 영원히 그대로일지 모를텐데
어제 내가 느꼈던 순간의 감흥은 마지막 한 번인 것처럼 아쉬움뿐입니다. 천년이 흘러도 동강의 비경을 그대로 간직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랄 뿐입니다.

그리고 돌아와서 보고 온 동강의 풍경을 그려보고 싶었던 생각이 어리석은 허상이란 것을 안 것은 다행인지도 모릅니다. 자연의 신비로움을 말과 글로 표현한다는 것이 한계성과 無知처럼 느껴지는 것을 글을 쓰려하는 요즘사 가끔 부딪치는 답답한 현상입니다. 예술가들의 고통이나 깨달음을 얻으려는 고행자들의 고통이란 불가사의한 자연현상의 순리나 종교의 진리를 내 안에 두려고 하고 보고 안다고 하는 것이 무의미한 것일지도 모르는데 모두 본 것처럼 정의하고 합리화 시키려는 욕심은 아닌지요.
떠나올 때는 사진으로 만 보았던 동강의 비경을 눈으로 보고 글로서
풍경사진 찍듯이 멋지게 그려 낼 수 없을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나 산골을 메아리쳐 울리는 꾀꼬리 소리와 물안개 피는 강가의 아침과
옥빛의 명주실타래처럼 굽이친 백리 물길을 따라 휘어진 산맥이 숨은듯 나타나는
병풍처럼 둘러친 청록의 산봉우리와 비경을 이룬 기암절벽의 절경 아래 서니
실로 짧은 입으로 말할 수 없는 감동에 마음은 정지되고 들꽃향기 흐드러진 나룻터에 그리움으로 머물러 떠나질 않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다시 그 순간적인 비경을 묘사한다는 것이 막막한 것은 언어의 한계성을 넘어 박제된 그림이나 어설픈 묘사를 벗어나 계절마다 동강은 어제 내가 심취한 감흥보다 더 신비로운 비경으로 어느 한순간 머물지 않는 새로운 모습으로 변할거라는 생각입니다. 단순하게 이미지마져 그릴 수 없는 궁색함에 겨우 오묘하다는 언어로 표현함은 내가 본 아름다운 자연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처럼 여겨집니다.
그래도 무량한 자연속에서 자각한 것이 있다면 누추한 설명일지 모르나 절대자가 창조한 이 자연의 신비로운 조화와 아름다움은
우리가 다 느낄 수도 없는 어마어마한 가치일 것이라는 느낌입니다. 크게 보아 내가 그 광대무변한 우주속에서 미물처럼
작은 소우주로 함께 한다는 것조차 복을 받았다고 해야 하나요.
비록 보잘 것 없는 생이라 해도 무한한 자연과 호흡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삶의 굴곡도 굽이굽이 흘러 온 저 강줄기 같았을까요.

어쩌다 나서는 여행에서 전 아름다운 자연의 모든 것을 보며 그 아름다운 것을 볼 수 있다는 느낌에 감사할 뿐입니다. 세상을 살면서 내가 정의하는 모든 아름다움을 무한히 느끼며 산다면 그것이 바로 가난하지 않은 삶의 행복일거라 생각합니다. 지금도 푸르름으로 출렁이는 기억의 문을 열면 門만 열면 山이라 한 동강의 門山이나 청아한 어라연 계곡의
구름을 인 푸른 산과 고요로운 강의 흐름이 마음을 꽉 채우고 있습니다.
산을 따라 흐르는 강물 하늘 따라 흐르는 구름 물을 따라 흐르는 세월
그 세월 따라 흐르는 인생 그 세월 따라 흐르는 푸르른 초목 물결 따라 흐르는 물새의 비상을 따라
내 생각의 유영도 구름으로 흐르고 물이 되어 흐르고 유록의 산빛이 되어 흐르고 물굽이를 따라 나룻배가 되어 흐르고

<한국화 김옥기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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