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가 타샤튜더를 알기 전엔 밀짚모자를 쓴 채 정원을 가꾸던 헤르만 헷세의 황혼기를 동경했었다. 알프스 호수가 보이는 산자락에서 과일나무와 정원수를 손보며 뜨락 가득 꽃을 가꾸던 헷세의 평온한 모습은 흐르는 흰구름처럼 평화스럽고 행복해 보였다. 노을이 비껴가는 정원에 캔버스를 놓고 조용히 그림을 그리던 헤르만 헷세를 무척이나 동경했는데 작년에 타샤 튜더의 아름다운 정원사진을 보고 무척 부럽고 놀라웠다. 비밀의 화원처럼 쉬임없이 피고 지는 꽃으로 타샤의 꽃밭이 신비스럽고 아름다운건 부유한 저택의 정원사가 꾸미고 가꾸는 조형적인 정원이 아니라 타샤가 맨발로 자연상태의 모습처럼 씨를 뿌리고 꽃을 심고 가꾸어 나무와 꽃밭, 빛과 바람, 작은 오솔길과 숲이 타샤의 아늑한 오두막과 어울려 생기있고 조화로운 자연을 만들고 있다는 것이다. 그 어떤 꽃보다도 타샤의 꽃밭은 동화속처럼 밝은 미소와 이야기가 피어나듯 화사하다. 꽃을 심고 사랑하는 사람과의 교감을 느낄 수 있는 정원을 보면서 생명을 가꾸는 게 얼마나 아름답고 보람된 것인지 짐작이 간다. 본디 생명은 정직하고 숭고한 마음을 지녔을 것이다.
부지런하게 욕심내지 않고 검소하고 자유롭게 사는 타샤의 일상을 보면서 우리의 삶은 그 얼마나 지루하고 권태로운가 돌아 보게 한다. 건조하게 죽어가는 삶을 사는 현대인에게 타샤의 일상은 작게나마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알려주는 지침서는 아닌가 생각한다. 작고 소소한 생명을 가꾸고 사랑하는 건 나의 내면을 다듬고 키워가는 자양분일 거다. 나의 자생지도 여름내내 집둘레에 꽃이 피는 가난하지만 향기롭던 흙담의 오두막이였다. 장마가 오기전 텃밭엔 노란 쑥갓꽃이 데이지꽃처럼 일렁이고 사철나무 아래 작은 꽃밭엔 글라디오스, 다알리아, 백일홍, 봉숭아, 분꽃, 과꽃과 맨드라미가 피고 마당 둘레엔 키 낮은 채송화가 색색의 꽃을 피우고 있었다. 마루의 봉창을 열면 뒷산의 어둔 숲에서 시원한 산바람이 내려오고 그늘진 고욤나무 아래선 주황빛 원추리가 여름을 노래하고 있었다. 타샤 튜더의 정원과 비교되진 않아도 마음속의 고향은 소담한 꽃밭도 있고 무엇보다 나를 감싸안는 정겨운 산과 숲이 가까이 있어 더운 여름을 식혀줄 산그늘이 있었다. 그러나 세월이 많이 지나고 지금의 삶을 얻기 위해 잃어 버린 게 너무 많다.
변화하는 동적인 세상에서 정적인 삶의 추구는 힘들고 진화되지 못하는 걸림돌일 수 있다. 그러나 과거로 돌아 갈 수 없는 현실이라 해도 마음 한 구석 나무 하나, 꽃 한 뿌리, 바람 한조각이라도 들여 놓을 수 있는 여백의 텃밭이 있었으면 좋겠다. 소란스럽고 삭막했던 마음의 묵정밭을 일구고 촉촉한 흙이랑에 아침마다 새꽃을 피우는 나팔꽃이라도 심고 싶다. 곧 우기가 올듯한 꾸물거리는 흐린날이 반복되면서 마음도 후텁지근하다. 마음으로나마 여름꽃이 흐드러진 타샤의 꽃밭을 거닐며 가벼운 새소릴 듣고 싶다. 한 차례 후두둑 후박나무 사이로 소나기가 지나가고 층층으로 핀 접시꽃이 춤을 춘다. 후투티가 더위를 피해 처마밑으로 숨는 유월의 끝자락이다. 솔향기 그윽한 잣나무 아래 흔들의자를 놓고 바람따라 그네를 타고 싶다. 설핏 졸음이 오면 오수에 들어 나는 헷세처럼, 아내는 타샤처럼 곱게 늙어 아름다운 여름꽃밭을 거니는 꿈을 꿀 것 같다. 흐린 날이지만 가벼운 생각의 끝에 흰구름이 높다. 내가 아는 블러그 지인들중 여러분이 타샤의 일상처럼 내 마음의 정원을 가꾸며 자연속에서 햇살처럼 맑게 사신다. 그들에게 늘 무한한 행복이 같이 하시길 이 자릴 빌어 안부를 전하고 싶다.
2007. 6 . 27 일. 먼 숲
<아래 글과 사진은 솜다리님의 타샤 튜더의 정원에서 옮겨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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