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 숲에서 오솔길까지

소 나 기

먼 숲 2007. 1. 26. 08:31

 

 

 

 

 

 

 

 

 

나 어릴 적 어머닌 소나기를 왜 삼형제 온다고 하셨을까. 어머닌 비지땀을 흘리며 팔월 복중에 조밭이나  콩밭을 매다가 앞산에 검은 먹장 구름이 몰려 오면 밭머리에서 놀던 나에게 삼형제 온다고 빨리 집에 가라고 성화셨다. 그리고 가끔은 열어 논 장독을 덮으라고 신신당부 하셨다. 산너머 먼 하늘가엔 불이 번쩍 번쩍 번개가 치고 우르르 꽝꽝 하는 천둥소리가 어린 꽁무니를 쫓아왔다. 숨이 턱에 닿게 까막 고무신을 신고 먼지나는 행길을 뛰어 집에 이르면 이내 앞산 골짜기 사이부터 장대같은 비가 쏟아졌다.

 

빈 집에 들어 선 난 마루끝까지 따라 온 천둥소리에 놀라 반다지 위의 솜이불을 꺼내 놀란 꿩새끼처럼 무서워 벌벌 떨며 이불속에 머릴 쳐 박고 있어도 아지직 하는 번개의 섬광이 불화살처럼 봉창의 창호질 뚫고 들어와 꼭 감은 눈 앞에서 번쩍거렸고, 조막손으로 귀를 막고 있어도 대포소리같은 천둥은 고막을 찢고 달팽이관을 울려놓고는 먼 산을 넘어 갔다. 그럴적마다 삼팔선이 가까운 곳에 살던 나는 육이오 전쟁이 또 터지는 거 같아 오돌오돌 떨며 캄캄한 이불속에 숨어 있었다. 전쟁 때도 무서운 총알을 피하려 솜이불을 뒤집어 쓰고 있었다는 애길 어머니한테 들었지만 그 때만 해도 툭하면 무장공비가 가까운  한강 둑에 출몰하여 어둔 숲에 들면 소름이 돋는 여름이였다.

 

한 차례 포성처럼 천둥이 울고 가면 우리집 흙담이 무너지지 않았는지, 동구 밖 늙은 당산나무 아래엔 누가 벼락 맞고 죽지는 않았는지 걱정이 되었다. 전기가 없던 그 시절엔 하늘을 가르던 번개와 천둥이 정말 무시무시했다. 이윽고 캄캄했던 하늘이 개고 먼 천둥소리의 여운이 잦아지면 곧바로 추녀에서 떨어지는 물소리가 정겨웠다. 가만히 방문을 열고 마루로 나오면 앞 산마루엔 비안개가 뽀얗게 몰려가고 대문 밖 옥수수밭엔 수정처럼 맑은 물방울이 맺혀 있었다.

 

그제서야 놀란 마음에 참고 있던 소피를 보려 봉당으로 나오니 폴짝거리며 개구리나 맹꽁이가 뛰어 다녔다. 꽈리, 봉숭아꽃이 송이 송이 층을 이뤄 핀 꽃밭으로 가면 입을 꼭 다문 분꽃나무 위엔 청개구리도 나와 있었다. 그 새 마당 가득 잠자리가 떼지어 원을 그리며 날고 비 그친 뒷 산 참나무 숲에선 우렁차게 매미가 운다. 어린 아이 혼을 앗아 간 무서운 삼형제는 어디로 달아나고 아무 일 없었는 듯 시치미 떼는 들판엔 둥근 무지개가 떴다. 들판을 가로질러 건너마을 우물에서부터 우리마을 우물까지 일곱빛깔 둥근 무지개가 곱다. 아마도 백두산 호랑이가 장가를 가는 모양이다.

 

소나기에 쓸린 도랑에 고인 물을 찰박거리며 무지개를 따라 가는 텃밭께는 까마중이 송글송글 익어간다. 한 차례 장대비가 지나간 개울은 붉은 흙탕물이 소용돌이 치고 내 또래의 조무래기들은 신이 나서 찌그러진 주전자와 어레미를 들고 물고기를 잡으러 나선다. 아이들은 물살이 센 개울에선 물풀사이로 퍼덕이는 힘찬 붕어 더듬질은 못하고 거품 물고 흐르는 논두렁 물꼬에 모인 송사리나 잡겠지만 비 그친 오후는 동네 아이들 재잘거림으로 소란하다. 무지개만큼이나 영롱한 어릴적의 풍경이다. 뜬금없이 추억을 거슬러 오르며 소나기를 맞아 보는 지금이지만 아직도 궁금한 건 어머닌 왜 소나기를 삼형제라 하셨는지 알 지 못한다.

 

 

2006 .8 .11 일  먼      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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