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 숲에서 오솔길까지

내 안의 어머니 <영화 "동승"을 보고>

먼 숲 2007. 1. 26. 0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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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산의 산벚꽃이 초설처럼 흩날리는 사월의 휴일 오후에 우리 네 식구는 꽃나들이 대신 영화 “동승”을 보았다. 영화를 보는 동안 소리 없이 지는 낙화처럼 나는 구석자리로 얼굴을 돌리며 안보이게 몇 번인가 맑은 눈물을 훔치며 어린 동승이 되어 울고 있었다. 그러나 그 눈물은 도념이라는 어린 스님의 맑은 영혼으로 인해 가슴 속 깊이 막히고 굳어졌던 응어리가 녹아 흐르는 맑고 투명한 카타르시스였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이 영화는 말라있던 마음의 골에 작은 시냇물이 되어 흐르며 서정적 영상은 지는 봄처럼 아련하게 사라져간다.

영화는 아들을 잃은 아름다운 미망인이 승선교를 건너오는 장면으로 시작해서 끝내 어머니를 찾아 무릎까지 빠지는 폭설이 내린 비탈길을 헤치며 떠나는 라스트 씬으로 사라진다. 아들을 잃고 49제를 지내러 산에 올라온 미망인의 등장은 자신이 어디서 어떻게 왔는지 조차 모르는 도념에게 부처님을 통한 깨달음보다 어머니라는 모성을 통해 자신의 출생과 존재를 확인하고 싶어 하며 사무친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 살아난다. 그리고 어머니에 대한 절절한 그리움은 불교의 계율까지 속이며 살생까지 하게 된다. 동승이기 전에 어린 소년인 도념에게 중요한 것은 회초리를 맞아가면서까지 속세의 인연을 끊는 불법이 아닌 자신을 품어주고 사랑해주는 본능적인 모성이었다. 영화 동승은 어머니라는 가장 공통적인 화두로 우리의 병들고 더렵혀진 마음을 돌아보게 하며 투명하게 정화시켜 주고 있었다.

 

 

 


영화를 보면서 참을 수 없이 주르르 눈물이 흘러내렸다. 또래의 아이들에게서 철저히 버림 받으면서 동승으로 살아가는 아픈 운명의 도념이 돌아 올 수 없는 어머니를 노을 지는 산봉우리에서 산 메아리처럼 불러보는 엄마에 대한 외침에서 울었고, 또 불행한 탄생의 업보도 모르고 토끼를 잡아 그 가죽으로 어머님의 목도리를 해 주고 싶어 했던 어린 스님과 어린 아들을 잃고 그 빈자리를 아파하며 도념을 수양아들로 삼으려 했던 미망인의 인연마저 이어지지 못하는 장면에서 다시 모성이란 헤아릴 수 없는 사랑 때문에 울고 말았다.

 

감당키 어려운 어린 스님의 아픔 앞에서 젊은 보살은 말한다. “어린 스님, 이 세상 모든 것들을 어머니라고 여기세요. 그러면 기다리지 않아도 되고 외롭지도 않을 거예요” 그 따스한 말에서 어머니란 존재는 삼라만상 어디에든 존재하는 마음의 부처가 아닌가 생각 되었다. 내가 어디서 왔고 왜 왔는지를 몰라 자아를 찾는 헤매임 속에서 내 그리움의 원초적인 고향은 항상 어머니였다.

 

 

 


영화는 “동승”에서 주경중 감독은 잃어버린 어머니와의 인연을 통해 또 다른 멧세지를 전하면서 지루하고 관념적인 종교영화라는 범주에서 한층 더 닫혀 진 마음을 열게 하였다. 그리고 하지 말아야 할 것이 더 많은 승가라는 절제된 산위의 생활과 산 아래의 자유롭고 흥미로운 속세의 삶을 그 경계선인 일주문 통해 여과 없이 넘나들게 하며 현실적인 모습을 편안하게 대비시키고 있다. 구도자의 모습에만 치우치던 종래의 관념적인 종교영화에서 좀 더 대중적인 연민으로 관객들에게 가까이 다가간다. 그러한 모습은 젊은 스님인 정심 스님의 수도생활에서도 급변하는 현시대와 불교가 가진 정체성인 괴리의 한 단면으로 보여준다.


포경수술을 이유로 큰스님에게 돈을 달라고 채근하다 번번이 큰스님에게 야단을 맞곤 하는 장면이 간간히 코메디처럼 웃게 했지만 어쩌면 돈과 포경수술은 정심스님에겐 훔쳐보고 싶은 비린내 나는 속세의 모습이였는지도 모른다. 포경이란  육신의 의미는 나를 둘러 싼 모든 번뇌를 벗어 버리고 더 큰 깨달음을 통한  해탈로 가는 통과의례의 두꺼운 껍데기였는지도 모른다. 그 빈껍데기를 벗어버리며 정심은 더 넓은 세상을 배우려 했는지도 모른다. 체험하지 않고는 얻을 수 없는 깨달음의 한계에서 젊은 스님은  다시 길을 떠난다.  "도념아, 이 세상엔 기다려도 안 오는 것들이 있단다. 내 것이 아닌 것은 기다려도 오질 않는 거야. 그러면서도 우리들은 모두 무얼 기다리며 산단다."

 

 

 

 

젊은 스님의 이 말이 허망한 생의 한 순간을 살면서 어리석게 욕심과 집착에 매달려 사는 우리의 덧없는 기다림을 순식간에 놓게 한다. 어쩌면 내 것인 것은 하나도 없는데 내 것이라고 움켜쥐려고 부질없이 한 생을 허우적대는 것 같았다. 어머니라는 자궁 속에서도 빈손으로 왔는데 내가 가져 갈 것은 무엇일까? 내가 돌아 갈 곳 또한 내 생명을 준 그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의 수레바퀴가 필름처럼 돌아가는 동안 점점 무겁던 마음의 티끌은 작아지고 있었다.


이러한 마음의 감동을 주는 영화 “동승”이 해외에서 먼저 격찬을 받은 것은 그러한 탄탄한 시나리오의 구성과 뛰어나게 아름다운 영상미 때문일 거라 생각했다. 단청마저 빛바래고 삭아버린 고찰인 봉정사나 선암사의 고즈넉함이 뚜렷한 사계의 변화 속에 아름다운 풍광과 어우러진 영상은 과장되지 않은 가장 한국적인 자연의 모습이였다. 어머니를 외쳐 부르던 민둥산의 부드러운 곡선이나 무성한 갈대밭으로 이어진 가을의 풍경은 그 쓸쓸함이 어머니를 찾아 헤매는 가슴속처럼 서걱거리기도 했다. 영화는 끝났지만 오월의 담채화처럼 그윽했던 산사의 풍경은 아침마다 비질을 해도 더 아련한 영상의 그림자로 적막한 절 마당에 내려앉았다.

 

 

 


내 안의 어머니를 찾아 난 어디로 떠날 것인가? 가질 수 없는 것을 갖기 위해 지워야 할 업보를 견디며 또 얼마나 헤매야 하는가? 우리의 수없이 짧은 인연들은 이끼 낀 샘가에 어렸던 도념과 미망인의 영상처럼 잠시 어른거리다 흘러간다. 세월을 흐르며 만났던 인연들 속에서 찾아오지 않을 기다림을 그리워하며 자줏빛 물봉선이 피어있던 그 여름의 골짜기나 때론 상사화가 피어있던 그 샘터에서 슬픈 동승이 되어 우린 내 안의 어머니를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미 영화가 끝난 지 오래되고 짙어진 오월의 신록은 깊은 골짜기를 이룬다. 그러나 굽이굽이 어두워지는 청산의 아득한 봉우릴 넘어 먼 뻐꾸기울음처럼 들여오는 “엄마!”라는 산 메아리는 환청일까?


2003.5.8일  먼    숲.

 

 

<옛 글 "추억의 오솔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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