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마음의 산그림자

낮술을 마시다 /<전윤호 시인의 세상 읽기 에서>

먼 숲 2007. 5. 31. 17:18

 

 

 

 

 

 

 

 

 

 

 

낮술을 마십니다. 모든 일을 제쳐 놓고 상심 위에 소주를 붓습니다. 술꾼들도 낮술은 꺼립니다. 낮술이 밤술까지 이어지기 쉽기 때문이지요. 벌건 대낮에 취한 얼굴로 다니는 것도 보기 좋은 풍경은 아닙니다. 하지만 기어코 또 낮술을 마십니다. 제 자신이 답답합니다. 어린왕자에 나오는 술꾼은 부끄러워서 술을 마신다 더니 제가 꼭 그런 꼴입니다. 사람을 믿고 기대하는 건 저의 오래된 악습입니다. 내가 해주는 만큼 아니 내가 해주는 것보다 더 받고 싶어하는 모난 심리가 꼭 한 방씩 배신을 당합니다.


그 사람은 또 제게 실망했을지도 모르는데 배신자라고 악다구니 를 하고 어두운 구석에 숨어 술을 마십니다. 따지고 보면 나 때 문에도 많은 사람들이 낮술을 마셨을 것입니다. 제가 하는 말 한마디, 제가 쓰는 글 한 줄에 상처 입은 사람들도 있었을 것입니 다. 그렇다고 또 저처럼 낮술을 마시는 사람은 이 사회에서는 문제아입니다. 다들 바쁘고 할 일이 넘쳐납니다. 저 역시 할 일이 산적해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어떤 일도 손에 잡히지 않습니다. 지금 제게 일을 하라고 강요하면 아마 엉망인 결과가 나오겠지요.


다행히 낮술을 좋아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혼자 마시기 외로우면 그들을 부릅니다. 그들은 제 할 일을 이미 끝낸 사람들입니다. 아니면 내가 미안해 할까봐 다 끝냈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한번은 ‘왜 술을 마실까’하는 문제로 토론한 적도 있습니다. 결론 은 여자가 화장을 하듯이 남자는 술을 마신다 였습니다. 그때 참석자 중에 여자는 없었으니 그런 편리한 결론이 나왔습니다. 생각해보면 그럴싸하기도 합니다. 여자들은 예뻐 보이려고 화장을 합니다. 남자들은 영혼이 맑아지라고 술을 마십니다. 그렇지 않 은 사람도 있겠지만 마음을 정리할 때 여자들은 거울을 보고 남 자들은 술병을 땁니다.


이거 너무 엄살을 부리고 있는 건 아닌지 한잔 마시고 상대방 얼굴을 바라보면 평소에는 몰랐던 그의 그늘이 보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아픔을 감추려고 노력하며 살아갑니다. 하지만 그런 노력이 너무 오래되면 얼굴에 가면이 한 꺼풀 쓰입니다. 그래서 낮술을 마셔야 합니다. 낮술마저도 마실 수 없는 환경이 되면 전 아 마 유리병에 갇힌 무당벌레처럼 죽고 말 것입니다. 이 불경기에 좋은 장삿거리가 없나 고민하는 분이 계신다면 전 낮술 전문집을 만들어 보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이 나라의 많은 사람들은 낮술을 마시고 싶어 합니다, 그리고 낮술을 마셔야 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서울 여의도나 광화문은 특히 잠재 고객이 득시글합니다. 낮술을 마시면 취하는 게 부끄 러워서 과음은 안 하게 됩니다. 많이 마시면 그 자리에서 자는 게 상책입니다. 그러니 낮술 전문! 술집은 의자를 크게 해서 잘 수도 있게 하면 좋을 것입니다.


나는 주정뱅이는 아닙니다. 알코올 중독자도 아닙니다. 하지만 기분 좋게 술을 마실 때보다는 속이 상해서 마실 때가 많은 불행한 술꾼입니다. 술을 즐겁게 마시는 친구들이 부럽습니다. 술을 마시지 않아도 버티는 뻔뻔한 사람들이 부럽습니다. 어떤 이는 그런 나를 보고 폐인이 다 되어 간다고 놀립니다.


이런 게 폐인이라면 술을 마시지 않고 나쁜 짓을 하는 자들은 정말 중증의 폐인입니다. 원래 술을 마시면 이렇게 안주처럼 남을 탓하는 것을 즐깁니다. 이러다가 어린왕자가 와서 왜 그렇게 술 을 마시느냐고 물어보는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사실 어린왕자를 만나고 싶습니다. 지금은 쓴맛을 아는 어른이 되었을 테니 같이 한잔 하고 싶습니다. 그러면 세상이 좀 더 환해 보일까요.

 

 

2007년 5월 31일 (목) 16:35   문화일보

 

 

 

 

 

 

 

 

'내 마음의 산그림자' 카테고리의 다른 글

SUMMER VACATION  (0) 2007.07.09
주먹감자  (0) 2007.06.04
밀 원 (蜜園)  (0) 2007.05.17
미루나무  (0) 2007.05.11
봄 밤의 애수  (0) 2007.04.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