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르네 마그리트! ■
르네 마그리트라는 화가는 마치 모르던 서양의 봄꽃 이름처럼 생소한 이름이였습니다. 고정관념이라는 것은 얼마나 위험하고 편협적인 가를 나이가 들며 그만큼 세상을 살면서 조금씩 깨닫게 됩니다. 편식을 하는 아이처럼 사고의 어느 한 부분이 고갈되거나 부서져 버리는 잠식적인거라 생각하면서도 늘 내가 좋아하는 쪽으로만 사고의 코드를 바꾸려 했음을 최영미 시인이 쓴 "화가의 우연한 시선" 이란 서양미술의 감상을 보면서 느꼈습니다. 비단 그러한 편파적인 생각이 사고뿐 아니라 우리의 일상사에서 자칫 극단적 이기주의나 집단주의로 빠질 수도 있고 내 생활반경과 패턴에 더 큰 영향을 준다는 것을 간과하지 않을 수 없겠지요.
늘 내가 좋아하는 레오나드로 다빈치나 렘브란트, 밀레, 그리고 많은 인상파 화가의 그림에만 고정된 시선을 주며 즐기고 초현실주의라는 난해하고 형이상학적이거나 추상적인 그림은 도외시 하는 편이였습니다. 많이 알려진 뭉크나 달리의 그림이 그 중 낯설지 않게 알고 있었지만 우연하게 르네 마그리트의 그림을 보고 신선하게 전해져 오는 이미지들이 음악이나 시로 표현 수 없는 우리의 상상이나 마음을 이렇게 그림으로 그릴 수 있구나 하는 새로운 공부를 하게 되었습니다. 언제나 캔버스 안의 화폭에 갇혀서 움직이지 않던 그림에 대한 감상이 마그리트의 그림을 만나고 나니, 꿈과 동화같은 샤갈의 그림과는 달리 마그리트는 현실과 배반된 이미지의 돌출에서 오는 충격으로 새롭게 탄생되는 신세계를 만나며 사고의 무한성을 경험하게 합니다.
르네 마그리트는 17세기 풍속화가 베르메르 같은 벨기에에서 (1898-1967)태어났습니다. 그의 일생은 생략하고 다만 그의 그림에서 느끼는 강한 이미지와 초현실주의를 이해하기 위해 최영미 시인의 글 중에서 일부를 인용하겠습니다.
『 물체를 본래의 맥락을 떠난 이상한 환경 속에 두는 것은 사람들에게 심리적 충격을 주어 무의식을 해방시키기 위한 초현실주의자의 전략이였습니다... 이성의 간섭을 받지 않는 무의식의 세계를 탐구해, 현실은 아니나 현실을 뛰어넘는 리얼리티를 실현하는 게 초현실 주의자들의 공통된 목표였는데, 살바도르 달리의 요란한 흥행술에 가려져 마그리트의 조용한 실험은 한때 과소 평가 되었습니다. 프로이드 정신분석학에 자극을 받아 마그리트는 꿈의 본질을 분석해 그림으로 보여 주었지요...그는 사물들 사이의 보이지 않는 고리를 찾아 그림 속에 구현하려 애썼지요. 서로 연관이 없어 보이는 이미지들 사이에 어떤 논리적 연관이 존재할 때 마그리트의 최고 걸작이 탄생했습니다. 』
저는 그의 그림을 보곤 시적 이미지들을 떠올렸습니다. 시공을 초월한 우주 공간에 배치된 모든 문명의 작은 오브제들이 그의 시각과 상상속에서 신비하고 새로운 의미와 소리가 탄생하는 것 같았지요. 결코 서로 연관 지을 수 없는 모든 이미지들의 배치가 어울려 오히려 강력한 힘과 상상의 에너지를 분출합니다. 관념이 아닌 일탈을 꿈 꾸는 마음의 자유가 새롭게 합니다. 하늘 공간에 배치된 방울과 구름속을 걷는 사람, 바게트빵과 구름의 병치관계, 창문을 통한 모든 시공의 넘나듬이 열리고 알과 산, 운석과 도시의 대치된 구도에서 생성과 소멸이 이어지기도 하고 자주 등장하는 사과를 통해 응축된 우주를 보기도 합니다. 낮과 밤을 하나의 화면에 공존케 하고 증기 기관차가 벽난로를 뚫고 나오며 초고속으로 발전하는 문명의 시간 개념을 깨기도 하지만 얼굴이 없는 그림자의 인물들은 익명의 모습으로 사는 현대인의 고독과 소외를 표현해 주기도 합니다.
물론 이 모든 제 느낌 또한 그가 말하려는 의도가 아니고 나의 고정관념일지도 모릅니다. 마그리트는 고정관념이라는 사고의 모든 틀에 갇혀 내가 누군지 우리가 무엇인지 모르고 사는 우리의 모든 사고의 철학적 관념마져 벗어 버리게 하는 질문과 해답을 스스로의 상상에서 찾도록 유도하는 것은 아닐까요? 참고로 그림 아래의 설명들을 달지 않을까 했지만 그래도 좀은 이해하기 쉬운 것 같아 두었습니다. 처음 좁은 식견으로 이런 그림을 소개하면서 보이지 않던 것, 아름다운 것, 신비로운 보물은 늘 알려져 있는 유명한 작품들 뒤에도 더 많이 있음을 알 게 한 "화가의 우연한 시선"이란 최영미 시인의 탁월한 안목에 감탄합니다.
2004.3.15일. 먼 숲
피레네 산맥에 있는 성 (1959)
긴장을 야기시킨다. 마그리트는 그의 고유한 조형언어로 사용하기 위하여 두 대립 요소들을 그림안에서 부각시킨다.
바람의 소리(1931)
황금빛의 전설 (1958)
아름다운 세계 (1960)
아른하임의 영토 (1962)
아름다운 현실(1964)
빛의 제국 (1954 ) <최영미의 화가의 우연한 시선 중에서>
위대한 가족 (1947)
여름 (1939 )
못 박힌 시간 (1938 )
12시 45분이라는 못 박힌 시간 위론 되돌아 볼 수 없게 어둡게 거울의 의미가 정지된 채 걸려 있고 대리석의 벽난로에선 거꾸로 증기 기관차가 돌진해 달리고 있습니다. 불이 꺼진 터널같은 벽난로를 따라 기관차가 역주행하며 막힌 시간의 벽을 허물며 하늘로 비상하는 꿈을 꾸는 듯 합니다
장롱속의 철학 (1947)
마그리트의 그림에 자주 나타나는 얼굴없는 형상들은 그의 불행한 가족사와 연결되지않을 수 없을 듯 한데, 알려진 대로 그가 14살이 되던 해의 어느날 밤 바로 동네를 흐르는 작은 강에 잠옷을 뒤집어 쓴 채로 그의 어머니는 세상을 떠난것이다.사인은 자살이었는데, 왜 마그리트의 어머니는 얼굴을 가린 채로 자살을 시도했을까.흰 잠옷으로 얼굴을 가린채 죽어있는 어머니를 목격했을 아이의 시선은 얼마나 불안하고 참혹한 느낌이었을까 생각해본다. 얼굴은 흰 천에 가려져 있고 그 천사이로 삐져나온 긴 머리카락과 거꾸로 뒤집어 쓴 잠옷 때문에 벌거벗겨져 있는 어머니의 육체...이유 없이 자살한 어머니. 얼굴을 가린 이미 죽어버린 어머니의 몸을 발견한 마그리트는 그 생명을 잃은 死者의 얼굴을 결코 보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한 유년의 기억은 그에게 있어 사람의 얼굴이란 늘 베일에 둘러싸여 있는 것으로만 표현하도록 만들었을 것이다. 기억하고 싶지 않은 과거를 회피하려는 본능이랄까.. 토르소의 모티브를 지니고 나타나는 그림들속의 잘려진 여체 혹은 조각난 신체들의 형상 또한 일종의 유년기의 우울한 기억에 의한 퇴행적 현상이라 여겨지기도 하는데 옷걸이에 단정히 걸린 잠옷위로 솟아나온 봉긋한 유방과 또렷한 유두의 형상 그리고 메니큐어를 칠한 발가락이 도드라진 신발을 보며 장롱속에 그로테스크하게 서있을그의 무의식을 본다.
The Lovers 연인 (1928)
공동의 창작 (1935)
물고기와 여인이 결합되어 인어의 반대 개념인 인간의 다리를 지닌 물고기를 만들어 냈다.
향 수 (1940)
이 그림은 제목이 향수이다.마그리트는 그림의 철학자로도 불리지만 신사였다고한다. 실제로 그의 사진을 보면 말쑥한 모습이고, 이 그림의 인물은 아마도 머리스타일로 보나 양복을 입은 모습으로 보아 마그리트 자신인 듯 하다.그림의 날개 달린 멋진 신사는 바다가 있는 다리에 나와 한없는 그리움에 젖어있다. 이른바 초현실주의 그림이라 단정짓게 하는 등뒤의 날개는 그리운 님에게 갈 수 없는 근원적인 슬픔과 안타까움을 지닌 자신의 내면이 지닌 갈망의 상징이다.그러면 다리에 버티고 앉아있는 장엄한 모습의 저 사자는 무엇인가. 그것은 두말할 필요없이 현실에 묶여있는 또 다른 세계를 상징하며 현실을 떠나 그리움의 바다에 갈 수 없는 고독한 자신의 모습일 것이다. 그 두개의 의식은 등을 돌리고도 모자라 머나먼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다. 사자는 우거진 숲이 있는 저 먼산을 바다보고, 신사는 바다를 바라보는 그둘의 시선이 결코 조우할수 없는 평행선처럼 서로 반대인 것이다.
좋은 관계(1967)
분열과 융합의 이미지가 이 그림에서 나타나고 있는데, 이제 막 잿빛의 어둠이 몰려오는 하늘엔 구름조각이 걸려있고, 안구의 모양을 하고 열기구가 둥실 떠있다. 하나의 사물이 다른 객체로 변신하는 그의 창조에 있어서의 기본 원칙을 본다.
지평선의 신비 (1955)
모자를 쓴 남자는 1950년대 이후 주요 테마의 하나가 된다. 대개는 뒷모습과 얼굴을 보이고 있지 않은 모습으로 그려져서 공중을 산보하기도 하고, 푸른 하늘의 실루엣과 얼굴 없는 인간이 되기도 한다. 이 그림에 등장하고 있는 세 사람의 모자를 쓴 남자들은 수수한 코트를 착용하여 마네킹처럼 비개성적이어서 한 사람의 남자가 세 가지 모양으로 방향을 바꾸기만 한 것처럼 보인다 |
'길 끝의 여백'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여백의 풍경 / 서정시의 화가 장태묵 (0) | 2007.03.15 |
---|---|
생각으로부터의 자유 / 르네 마그리트 (0) | 2007.03.02 |
전통의 향기속으로 / 화가 엄옥경 (0) | 2007.02.16 |
먹빛의 구도자 / 한국화가 박 대 성 (0) | 2007.02.14 |
강승희의 그림 / 새벽 (0) | 2007.02.0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