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막』 그 황량함의 한 가운데서
일요일이었던가 "팔월의 크리스마스"란 영화를 TV를 통해 보면서 지금이 팔월이니까 저 영화의 감상을 얘기해 볼까 생각도 했다. 시한부 인생을 사는 흔한 이야기를 군더더기 없이 청승떨지 않고 담담하게 그려 가는 한석규의 너무 자연스러운 연기와 코스모스 같은 심은하의 청초함이 단골메뉴 같은 내용을 오 헨리의 "마지막 잎새" 란 소설이 떠오르는 가을로 접어들게 했다. 변두리의 사진관을 따라 물드는 가로수의 단풍처럼 죽음을 의식한 한석규의 조용한 절규가 물들어 오고, 어느 날 그 가로수의 낙엽처럼 사라지는 자신의 초상을 스스로 흑백의 영정사진으로 마감하는 영상이 마음에 쓸쓸한 잎새가 되어 흔들렸다. 결국 이 흔한 이야기도 성에 차지 않아 평범한 일상을 한석규의 연기처럼 자연스럽게 그려볼까 하는 소나기가 오락가락 하는 요즘 날씨 같은 변덕스런 생각을 접지 못하고 있었다. 봄에는 녹은 땅에 솟아나는 새싹처럼 글이라 할 것도 없는 생각이 잘도 솟고 때론 봄꽃잔치처럼 화려한 글을 써 보고 싶더니만 여름 들어 내내 마음은 짙푸른 산과 숲이 되고 무성한 나무가 되어 산 그림자처럼 가라앉아 있었다. 마치 마음은 나무가 되어 초록 이파리의 엽록소가 되어 여름의 사념을 푸른 잎으로 충전하고 싶어하는 가식적인 이유를 달고 먼 산만 생각했다. 그리고 여름의 막바지에서 상념의 푸른 언덕을 넘어 내 젊은 날을 반추해 본다. 어제 연대 앞 굴다리를 지나면서 창천교회의 현수막에 "인게이지먼트 oooo" 라는 생소한 제목에서 유독 인게이지먼트란 외래어에 눈길이 머물고 그 단어를 보는 순간 6년간의 사우디 시절이 파노라마로 떠오르며 생각의 실마리가 풀려, 난 너무 황량했던 이국생활의 실타래를 풀어내게 되었다. 인게이지먼트(ENGAGEMENT)란 영어단어를 사전에서 �아 보면 약속, 약혼, 일, 일자리, .... 그리고 계약등의 뜻이 나온다. 난 그 단어의 뜻과 연관되어 80년대 중동의 노동자로 계약되어 고용인이 되어 일자리를 찾아 미련 없이 처음 비행기를 탔다. 나를 시험하고 새로운 모험을 하는 마음으로 당시 막막했던 상황에서 탈출구를 찾아 열사의 나라 사우디아라비아의 노동자의 한사람이 되었다. 그 다음 해부터 인게이지먼트라는 고용계약서를 연장하며 사막의 풍토와 고독감에 익숙해져 갔다. 엊그제 말복을 지난 한 낮은 삼십도를 웃도는 삶아대는 날씨다. 유난히 열대야가 잦은 올 여름을 지내며 찌는 듯한 더위란 수식어를 생각할 때마다 난 사막의 나라 사우디아라비아의 여름을 잊지 못하고 그 추억으로 여름을 난다. 그 곳의 여름을 수식할 수 있는 적당한 비유를 찾지 못한다. 마른 가마솥을 달구는 그런 뜨거운 폭염이다. 지역에 따라 다르지만 내가 6년을 보낸 리야드는 고원지대라 무척 건조하다. 습기가 없는 여름은 햇볕을 피하고 에어컨을 안고 살면 견딜만하다. 그러나 일년 내내 냉방병 같은 긴장된 건조감은 때론 피를 말리는 권태로움을 동반한다. 그것이 사막이다. 6년이란 푸르고 아름다운 젊은 날의 감정이 사막으로 황폐화되고 고사목처럼 말라 가는 느낌을 견디기 위해 난 쉴새없이 나 자신의 나무에 고국의 물과 빛과 공기와 소리를 들려주며 스스로와의 싸움을 견뎌야 했다. 앞이 안 보이는 황사가 자주 쌓여가며 어렴풋한 사막의 봄이 지나가면 긴 여름이 온다. 아무리 두 겹 세 겹으로 문을 닫고 커텐을 쳐도 황사가 지나간 아침은 보이지 않는 잔모래로 서걱거린다. 책상이 뿌옇고 늘 하늘이 두꺼운 먼지로 막혀 있다. 이렇게 숨막히는 긴 여름을 견디는 것은 고행이다. 불덩이처럼 달궈진 콘크리트 건물을 종일 에어컨으로 식혀도 기온이 내려가지 않는다. 한밤이 되어 겨우 식었나 싶어 잠을 청하면 새벽부터 햇살과 함께 열기는 불을 뿜고 달궈진 쇳덩이가 된다. 차츰 더위에 적응해 익숙해 가지만 무엇보다 더 힘든 것은 하루라도 땀을 배출하며 느끼는 개운한 맛을 느낄 수 없는 것이다. 습기가 가중되어 후덥지근하고 끈끈한 것도 괴로운 것이지만 여간해선 땀이 나지 않는 고원지대의 건조함으로 때론 내가 몸 안의 수분이 다 증발되어 미이라가 되는 것은 아닌지 하는 느낌이 든다. 아마 그것은 표출할 수 없는 감정의 메마른 상태에서 오는 정신적 공황이었는지도 모른다. 누런 모래사막 외엔 푸른색은 상상으로만 느껴야하고 문화와 격리된 황폐한 사막같은 이슬람문화는 사계절로 인한 풍부한 감성을 가진 우리에겐 감옥이나 다름없었다. 카렌다를 넘길 적마다 고향의 아름다운 사계절을 상기시키며 메말라가는 감정을 유지하고 졸아드는 듯한 신체의 리듬을 위해 아침저녁 조깅이나 축구를 하며 일부러 땀을 흘려야 했다. 그것은 공사 현장에서 비지땀을 흘리는 노동자들과 비교하면 사치이고 욕먹을 일이다. 그 많은 현장의 노동자는 별이 뜬 꼭두새벽에 일어나 아침을 먹고 우르르 버스에 올라 현장으로 나갔다가 뽀얀 흙먼지를 뒤집어 쓴 채 지친 몸으로 막사로 돌아온다. 노동으로 인한 그들의 피곤한 모습은 숭고해 보이기까지 했다. 그래도 항상 그들을 맞이하는 침대엔 희망과 그리움이 있고 고향이 있고 사랑하는 가족의 체온이 기다리고 있어 그들은 행복해 보였다.
긴 여름의 권태로움을 견디려고 가끔 레코드상점을 찾아 해적판 테이프를 수없이 사다 음악으로 달래고 고독감과 향수병(鄕愁病)이 밀려오면 휴일 아침 혼자 차를 달려 먼 사막의 한가운데로 가서 태고의 바람소릴 기울여 보고 이명(耳鳴)처럼 아득한 세월의 소릴 들었다. 그러면 사막은 시간을 역행해 타임머신을 타고 태초의 지구에 와 있는 착각을 갖게 하고 아무도 없는 혼자라는 내 모습을 의식하며 사막에 서면 어느덧 고독의 바람으로 긴장감을 느낀다. 이슬람의 기도소리로 낯선 거리를 누비며 할라스 바람(황사)에 세월의 두께가 쌓여도 마음은 길들여지지 않고 점점 내 몸의 푸르름은 증발되어 누런 황달이 드는 느낌이었다. 사막은 수분이 모두 빠져나간 마르고 건조한 고체다. 꽃잎조차 촉촉함이 말라버린 종이꽃처럼 바삭거린다. 만져보면 스낵과자처럼 아사삭 부서질 것 같은 꽃잎이다. 푸른 잎의 종려나무도 조화(造花)처럼 마른 촉감이다보니 생각마저 마른 먼지로 사라져 황막한 사막이 되는 것 같고 고향의 기억마저 오래된 화석이 되어 저 모래벌판에 나뒹굴 것 같아 시원한 물줄기로 솟아오르는 분수를 그리워하며 자꾸 생각의 뜨락에 물을 뿌린다. 그리고 계절이 바뀔 적마다 글로서 고향의 풍경을 그려보며 망향을 달랬다. 사막에도 많은 생명체들이 건조함을 이기며 살아가고 있지만 멀리서 보면 죽어 있는 것 같다. 아니 정지 된 느낌이다. 물이 흐르지 않는 사강(砂江), 모래로 뒤덮인 언덕의 사구(砂丘), 드문드문 마른풀만 늦가을처럼 있는 황야(荒野)와 나무도 없는 굳어버린 진흙덩이의 민둥산이 전부다. 아주 먼 곳에 오아시스도 있지만 그곳은 항상 멀다. 그래서일까? 사막의 한가운데선 아련한 신기루를 그리워하면서 원초적인 종교를 느낀다. 소유한 것 모두 버리고 싶어지고 그 소유란 의미가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 같은 빈 마음이 되어 사막을 가로지르는 낙타가 되고 싶어진다. 파라다이스가 아주 먼 오아시스 뒤에 있을 것 같아 순례자처럼 떠나고 기도하고 싶어진다.
이렇게 한해 한해를 살면서 젖은 마음자락이 말라 권태의 사막이 되어 가면 긴 머릴 짧게 잘라보기도 했다. 그리움처럼 자라는 머리칼은 시간의 흔적이 되고 어느새 젊은 날은 모래바람으로 사라져 갔다. 그 사이 먼 별리의 시간은 그리움만 키우고 날마다 한번씩 동쪽의 먼 하늘을 바라보는 향수병(鄕愁病)으로 세월을 뒤척였다. 삶은 길들여 산다고 하지만 고향의 뚜렷한 사계절의 아름다움에 절어있던 마음은 결코 사막의 황량함에 길들여지지 않았다. 우린 가끔 똑같은 일상에서 아니면 새로운 모험을 위한 일탈(逸脫)을 꿈 꿔 본다. 나 역시 궁색했던 젊은 날을 벗어나 신천지를 그리워하는 마음으로 고국을 떠난 중동의 이국생활은 그 일탈의 연속이었다고 본다. 나를 속박하는 간섭과 체면, 나를 힘들게 하는 경쟁과 비교의 굴레에서 벗어나 벽을 쌓고 혼자만의 은신처처럼 떨어져 사는 순간은 편하고 자유로울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 일탈은 끝내 한 무리에서 소외된 도태(淘汰)일 수도 있다. 일시적인 일탈은 다시 그 무리 속에 되돌아가 다시 시작해야 하는 낯설음에 적응해야 하고 새로운 뿌릴 내려야 한다. 지혜로운 삶은 떠나고 되돌아오는 반복이 아닌 자신의 위치를 정한 땅에 깊이 뿌릴 내려 바람에도 흔들리지 않는 삶을 영위하는 평범한 진리가 아닐까? 되돌아보는 뒤안길로 먼지바람이 일어간다. 삶엔 신기루가 없다. 또 하나의 환상이 비춰지지 않는 현실일 뿐이다. 오아시스는 내 마음에 있는데 먼 곳에서 찾으려 한다.
이젠 돌아와 뒤늦은 삶의 뿌릴 내리고 살지만 출발선에서 늦은 스타트는 앞서기에서도 밀린다. 그 비교와 경쟁을 모두 생각하기엔 이미 먼 세월을 살고 있다. 기회와 시기를 따지기엔 두 번의 반복도 없다. 그러나 젊은 날의 일탈을 후회하진 않는다. 그것도 나의 꿈이었는지도 모른다. 지나고 나니 그 시절도 아름다운 추억으로 단풍이 든다. 여름 내내 시퍼런 초록에 물들어 살면서도 가끔 따가운 땡볕에 서면 그 황량한 사막이 그리워진다. 나는 솔 향기 짙은 산길을 가면서도 때론 그 길이 사막의 지평선으로 이어져서 혼자 낙타를 타고 마음의 오아시스를 찾아간다. 나는 다시 일탈을 꿈꾸지 않지만 마음의 신기루는 지우지 않는다. 인생의 짧은 여정에서 사막의 한 복판을 건너온 젊은 날은 비록 황량했지만 그 길은 내 인생의 또 다른 초원일 수도 있다. 우리가 그리워하는 파라다이스는 어쩌면 먼 신기루일지도 모른다.
<後記> 젊음의 시간은 아름답습니다. 하지만 지금 난 지치고 힘든
우린 살면서 모두 무언가에 목말라 하고 적어도 철이 든 이후 그러나 젊음은 그 모든 장애물에도 대처할 수 있는 용기가 있습니다. 젊음은 어딘가에 오아시스가 있다고 믿고
비록 힘들더라도 더 많이 남아 있는
2000.8.24일 추억의 오솔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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