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이 읽는 詩

봄날은 간다 / 기 형 도

먼 숲 2007. 1. 29. 1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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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봄날은 간다 』

 

 

            기형도

 

 


햇빛은 분가루처럼 흩날리고
쉽사리 키가 변하는 그림자들은
한 장 熱風(열풍)에 말려 둥글게 휘어지는구나

아무 때나 손을 흔드는
미루나무 얕은 그늘 속을 첨벙이며
2時着(2시착) 시외버스도 떠난 지 오래인데
아까부터 서울집 툇마루에 앉은 여자
외상값처럼 밀려드는 대낮

신작로 위에는 흙먼지, 더러운 비닐들
빈 들판에 꽂혀 있는 저 희미한 연기들은
어느 쓸쓸한 풀잎들의 자손일까

밤마다 숱한 나무젓가락들은 두 쪽으로 갈라지고
사내들은 화투패마냥 모여들어 또 그렇게
어디론가 뿔뿔이 흩어져 간다

여자가 속옷을 헹구는 시냇가엔
하룻밤새 없어져버린 풀꽃들
다시 흘러들어온 것들의 人事(인사)
흐린 알전구 아래 엉망으로 취한 군인은
몇 해 전 누이 얼굴을 알아보지 못하고,
여자는 자신의 생을 계산하지 못한다

몇 번인가 아이를 지울 때 그랬듯이
습관적으로 주르르 눈물을 흘릴 뿐
끌어안은 무릎 사이에서
추억은 내용물 없이 떠오르고
小邑(소읍)은 무서우리만치 고요하다

누구일까
세숫대야 속에 삶은 달걀처럼 잠긴 얼굴은

봄날이 가면 그뿐
宿醉(숙취)는 몇장 紙錢(지전) 속에서 구겨지는데
몇 개의 언덕을 넘어야 저 흙먼지들은
굳은 땅 속으로 하나둘 섞여들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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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박항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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