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호강을 건너 청량산을 오르는 길은 가파른 급경사였다. 그래선지 마을도 없이 아직 숲은 처녀림처럼 맑고 싱그러웠다. 그리 넓지 않은 계곡은 큰 물이 지난 후라 거울처럼 맑다. 태백산 줄기의 산이라선지 꼿꼿하게 붉은 적송이 깎아지른듯한 절벽에서 굽은 것 없이 곧게 뻗은 기상으로 치솟고 그 아래 단풍나무,신갈나무나 물푸레나무같은 활엽수림이 어둔 숲을 이루었다. 금탑봉의 높은 봉우릴 넘은 산그림자가 계곡에서 서늘하게 누워 낮잠을 자고 있는 오후 견딜 수 없는 더위를 식히러 중간에 차를 세우고 계곡물에 발을 담군다.
잠시 땀을 식히려 개울가의 늙은 느티나무 그늘에 드니 신선이 따로 없다. 잠자리 나비떼가 한가로이 개울가를 오르내리고 바위틈 여기저기 참나리꽃이 고고한 자태로 내려다 보며 피어있다. 화전을 일군 비탈밭엔 옥수수가 여물어 가는데 반은 쥐가 갉아 먹었다. 고랑이 보이지 않는 콩포기도 아깝게 들쥐나 야생동물의 밥으로 축날 것 같아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돌아서면 땀이 흘러내려 시원한 등목을 하며 푸르고 아름다운 산봉우리를 올려다 본다. 청량산 너머로 흰구름이 한가롭고 하늘은 맑고 푸르러 가을이 느껴진다. 이미 가을은 저 산을 넘어 오고 있는지 모른다.
구불구불 산길을 오르니 육모정이 나오고 주차장이 있다. 아마 이곳에서 등산로가 시작되고 청량사를 오르는 길목이 되는 것 같았다. 청량산의 샘물을 먹을 수 있는 수도가 있어 목을 축이니 차고 달다. 땀을 닦고 물통에 물을 담았다. 올려다 보면 아득한 봉우리만 보일 뿐 숲 안의 비밀은 짐작할 수 없다. 차를 주차한 후 가파르게 포장된 길을 따라 올랐다. 나중 알고 보니 포장된 길은 부식을 실어 나르는 차만 오를 수 있는 길이고 입석이란 곳으로 오르는 우회도로가 있는데 솔숲길이라 한다. 먼저 보이는 길이라 선뜻 들어섰는데 서서 걸어도 기어가는것처럼 가파른 언덕길이다. 어디선가 솔바람이 불고 이름모를 꽃향기가 번진다.
숨이 턱에 닿는 비탈길을 몇 굽이 돌고나니 관절이 뻣뻣해진다. 산길을 따라 이어진 계곡은 대낮에도 습한 어둠이 서려있는 우거진 숲이다. 처음 산길을 걷는 아이들이 지쳐 내려가자고 주저앉고 만다. 그 상황에서도 청량사는 추녀 하나 보이지 않고 입구에서 받아 온 물만 동이 났다. 겨우 추수려 한굽이를 돌고 나니 갈림길이 나오고 오산당, 산꾼의 집, 이정표가 나오고 드디어 청량사 입구가 보인다 . 일주문이 따로 없이 범접할 수 없는 가파른 길목이 바로 일주문이였다. 숨차게 오르는 힘겨운 순간에 이미 무겁고 때묻은 속진과 욕심을 땀과 함께 벗어 놓게 되어 저절로 청량사 입구에선 가볍게 연화봉을 향해 다소곳 합장할 수 있었다.
<사진: 청량사 홈페이지에서> 주지스님의 검정 고무신부터 경내의 모습입니다.>
아름다운 풍광과 마음에서 우러나는 감회를 글로 그려낸다는 것이 모순임을 알면서도 내 기억을 기록해 놓고 싶다. 입구를 들어서자 가파르게 굽어진 길에 촘촘하게 침목을 깔아 마치 서울 근교 카페길을 걷는 것 같은 친숙함이 느껴지고 그 생각의 첫머리에서 "바람이 소리를 만나면" 이란 안심당의 전통찻집이 창넓은 통유리를 통해 먼 저잣거리의 지친 나그네들을 맞이한다. 법당을 들어서기 전 이 찻집이 먼저 있어 불자가 아니드래도 산을 찾은 모든 사람들이 격없이 편하게 차를 마시며 마음을 바라 볼 수 있는 자리가 될 수 있도록 여유롭게 열려진 공간을 만든 지현스님의 배려가 아닐까 생각케 한다. 대부분 사찰을 찾을 때 기도하고 제를 지내는 엄숙한 공간으로만 생각케 하는데 청량사를 들어서니 그야말로 산소같은 청량감이 먼저드는 이유도 단청으로 화려한 법당과 전각들만 보다가 단청을 칠하지 않았지만 결코 전통을 거스르지 않은 현대적인 단아한 나뭇결의 요사채나 안심당의 건물과, 산과 계곡의 곡선을 그대로 살려 자연스럽게 배치된 사찰의 구조와 깔끔한 경내의 모습때문이리라. 연화봉 아래로 부는 바람이 절골의 물소리와 만나 내 안의 소리를 듣게 하는 곳이 안심당의 마음자리인 것 같다.
사실 청량사가 들어 앉은 자리도 계곡이 끝나는 절벽이다. 절이 앉기엔 협소하고 가파르기만 한데 그런 공간을 층층이 아름다운 축대를 쌓거나 단을 지어 배치함으로서 그 모습이 아기자기하고 독립된 미로 다가선다. 법당인 유리보전으로 오르는 길가엔 기와를 이어 물길을 낸 도랑물이 위에서부터 졸졸졸 맑은 소리로 흘러 내려 안심당을 거쳐 작은 연못으로 흐르고 오층석탑으로 이어진 벼랑엔 배롱나무 꽃위로 주홍빛 참나리꽃이 전설처럼 피어있다. 삼단 정도로 나눠진 공간 분할에서 맨 아래가 안심당과 연못이 있고 중앙에 범종각과 우물이 있다. 이 곳 범종각이 청량사의 중심인것 같다. 유리보전에 올라 보니 연꽃처럼 핀 열두 봉우리 가운데 청량사가 있고 그 연꽃의 꽃심에 범종각이 있어 아침 저녁으로 만물을 깨우는 소리의 중심이 되고 있다. 범종과 법고 운판과 목어가 있는 범종각의 중앙을 지나 계단을 오르니 고려 공민왕의 친필로 쓰여졌다는 "유리보전"의 현판이 보인다. 유리보전은 약사여래불을 모신 곳이고 이 본전에 모셔진 약사여래불은 특이하게도 종이를 녹여 만든 귀중한 지불이라 하였다.
"본전 앞에는 잘 생긴 소나무가 한 그루 있다. 이름하여 삼각우총(三角牛塚)이다. 옛날 절을 처음 세울 적에 아랫마을에서 뿔 셋 난 큰 소를 보시했다고 한다. 소는 팍팍한 비탈을 잘도 골랐고, 불사가 끝나자 그 자리에서 죽어 묻혔다고 했다. 그만치 힘든 불사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 이런 설화가 있는 노송 아래 오층석탑이 우뚝하니 절벽에 서 있어 청량산의 풍광을 조망하고 빛을 밝히는 등대처럼 서 있다. 다른 사찰과 달리 탑이 멀리 떨어져 나와 독립된 기도의 공간처럼 자리잡고 있으며 탑의 위치에서 보는 청량산의 육육봉의 연꽃은 절경이다. 이 곳에 서면 자신이 산에 갇혀 산중에 있음을 느끼게 되지만 그 갇혀 있음이 답답하게 느껴지지않고 산이 나를 품고 있는 것 같은 평온함으로 젖어 온다.
이러한 비경과 청정한 산의 아름다움에 반해 아마도 이미 답사문화의 고전이 되어버린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에서 유홍준씨가 “아까워서 소개하고 싶지 않은 곳”이라고 조심스럽게 토를 달아 놓았는지도 모른다. 청량사는 산속에 숨어 은거의 자태로 있기 보다는 내가 그 곳에 있을 때 내 존재를 의식하며 자아를 찾아야겠다는 작은 불심의 심지가 돋아나게 한다. 굽어보는 산 아래엔 짙어진 초록의 산봉우리가 흐르고 올려다 보는 머리위엔 너그러운 흰구름이 한가롭다. 무엇을 알려하는 욕심보단 바라보는 여유로움속에서 연꽃이 피는 것 같다. 비가 오는 청량산의 산안개는 어떤 얼굴일까? 선불장 축대 위에 보랏빛 수련이 피었다.
2004.8.3일 紫雲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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