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 숲에서 오솔길까지

청량사 기행기 3 <새벽이 오기까지>

먼 숲 2007. 1. 26. 0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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짙푸른 산 속에 들었는데 매미소리까지 맑고 푸르다. 청매미 소리가 산골 물소리처럼 시원하다. 오후의 햇살이 연화봉 산그늘에 가려져 조금씩 기세가 꺾일 즈음 샘가에서 땀을 씻고 유리보전에 들었다. 넷이 나란히 서서 삼배를 올리고 이 곳가지 오게 한 부처님의 가피를 감사한 마음으로 바라 보았다. 푸른 청사과 네개가 단촐하게 올려져 있는 단아한 불상 앞에 황국이 가을처럼 피어있다. 뒷걸음으로 내려와 오층 석탑 앞에 앉으니 산바람이 일렁인다.

 

동쪽을 향해 있는 석탑 아래서 산을 내려다 보며 오래 절을 했다. 내가 사는 사바 세계를 향해 아래로 아래로 구부려 절을 하니 더 마음이 편하다. 이 힘겨운 세상, 점점 어찌 살아야 할 지 막막해지는 첩첩산중의 세상을 향해 무엇을 빌어야 할까?. 그 답은 내려다 보는 산하의 푸르름처럼 그렇게 풍요롭고 평화로웁기를 기원하는 마음이 아닐까. 일어서 사방을 둘러보니 내가 탑처럼 서서 그 중심에 있다. 마음의 탑이 저리 금탑봉의 적송처럼 곧고 청청하게 자랐으면 하는 서원의 마음 사이로 저녁 해가 서쪽으로 향한다.

 

저녁 공양을 하러 한참 아래로 내려 갔다. 마땅하게 자리할 터가 없어선지 공양간이 골짜기 구석에 있어 한갓져 좋긴 한데 공양주의 고생이 여간 아닐듯 싶다. 허름한 하우스 안이지만 통나무 탁자에 둘러 앉아 밥을 먹는 맛이 즐겁다.이 더위에 고생하시는 노보살님께 미안한 마음이 들어 설겆이를 거들고 언덕길을 오른다. 몇 번 오르내리면 배가 꺼질 것 같아 포만감을 줄이는 거리감이 괜찮은 듯 싶다. 저녁 산책겸 응진전을 다녀 오려고 산길로 내려 가자니 오산당과 산꾼의 집이 나온다. 오산당은 퇴계 이황이 청량정사란 정자를 짓고 이 명당의 한 자락에서 공부를 하던 이라니 비록 퇴락하여 지붕에 풀이 솟아 올랐지만 그 기풍이 사뭇 산세를 닮아 옛 시절엔 푸른 선비의 글 읽는 소리가 맑았을 듯 싶다. 지친 걸음으로 산비탈을 오르는데 저녁예불 시간이 되었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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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고를 두드리는 소리가 장엄하다. 산골짜기의 메아리가 점점 몰아치는 법고 소리와 범종소리로 긴장한다. 종소리에 끌려 가던길을 되돌아 와 저녁예불에 참석했다. 수련회에 온 청년들이 법당안에 가득차니 사뭇 부처님의 미소가 젊어 보인다. 예불문을 마친 그들은 석탑 아래서 백팔배를 올리겠다고 바람처럼 빠져 나가고 스님의 천수경 소리만 저녁 법당에서 해걸음처럼 저물어 간다. 참으로 오랜만에 엎드려 참회의 맘으로 내 안을 들여다 본다. 지쳐가고 시들어가는 중생의 굽은 등이 땀에 젖는다. 그래도 오늘은 좌선함 청량산처럼 푸른 등이다.

 

선불장 연꽃이 이울고 어둠은 순식간에 절골의 적막함과 함께 깊어가고 소쩍새 소리가 또렷해진다. 캄캄한 어둠은 검은 황소처럼 웅크리고 앉아 밤바람에 흔들리는 풍경소릴 듣고 있다. 법당의 추녀와 오층탑을 비추는 불빛이 아름답다. 신새벽을 보려고 일찍 잠자리에 들었으나 잠이 오지 않는다. 발을 친 분합문 사이로 소쩍새 소리만 구슬프다. 잠들지 못한 젊은이들이 마당을 오가며 더운 여름밤을 뒤척인다. 한소끔 눈을 부치고 나니 달빛이 환하다. 부시시 일어나 보니 새벽 세시다. 새벽예불 시간도 가깝고 해서 자릴 털고 나와 툇마루에 앉아 새벽을 응시한다.

 

오층탑 위로 보름달이 떳고 아직 어둠속에 있는 산사의 그림자는 마당을 덮는다. 소피를 보러 해우소를 가는 사이 탑위의 달도 따라 산을 내려간다. 제자리에 머문 것 같던 달이 자릴 옮길적마다 다른 곳에 있다. 배회하는 마음자리도 그러할까? 늘 변하고 흔들리는 마음자릴 알 수 없지만 잡으려 하면 늘 잡을 수 없는 그자리에 있는 것 같다. 공연히 있고 없고의 존재를 생각하는 내가 공하다. 하늘을 올려다 보니 열두봉우리에 둘러쌓인 청람빛 하늘이 연못처럼 잔잔하다. 하늘연못엔 밝고 영롱한 뭇별이 총총이 쏟아져 내려 물살처럼 반짝이고 멀리 동녘은 여명이 가까와 진다. 새벽을 조우하는 신선함처럼 별빛도 푸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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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네시, 지상의 모든 중생을 제도하기 위한 법고에 이어 범종과 목어 운판이 차례로 울리면서 땅과 하늘, 날짐승과 길짐승, 새와 벌레까지 뭇 생명이 깨어나고 있다. 새벽 깊은 산골짜기에 퍼져 나가는 북과 종소리가 청명하고 은은하다. 새벽 예불이 시작되고 목탁소리에 맞춰 예불문을 노래하는데 울컥 뜨거운 감응이 솟구친다. 목이 막히며 아득해지는 그 순간의 경배는 무거운 업장이 녹아내리는 듯 해 난 이 깊은 산사의 새벽예불을 기다려왔다. 예불이 끝나고 새들이 가장 예쁘게 노래한다는 새벽 다섯시 쯤 새벽 안개가 바람처럼 밀려간다.

 

새들이 스님이 친 운판소리에 깨어났을까. 적막하던 숲은 새소리에 깨어나 산안개로 푸른 세수를 하는 것 같다. 속진을 덕지덕지 묻히고 온 나그네도 종소리에 깨어 마음이 맑고 가볍다. 온 산이 다시 초록빛으로 일어나 부산해지는 시각, 공양 전 새벽 숲을 헤치고 어제 못 간 응진전 오솔길로 들어섰다. 어느새 햇살이 솔숲을 파고 든다. 응진전을 오르는 길이 짧은 거리임에도 가파르고 숨차다. 꼬불꼬불 숲길을 돌고 도는 계곡엔 몇백년 �음직한 다래덩굴이 용트림치고 있다. 그 용트림처럼 돌고나니 어풍대가 있고 그 굽은 자리에서 내려다 보는 청량사는 적멸보궁처럼 아늑하다. 굽어보는 산 아래의 아침이 신선한 기지개를 펴고 있다.

 

어풍대를 돌고 나니 응진전(應眞殿)이다. 응진전을 가는 좁은 길이 생각해 보니 산 입구에서 아득하게 바라 본 금탑봉의 봉우리인 것 같았다. 떡시루처럼 켭켭으로 적송과 바위가 드러나던 그 산봉우리 칠부정도의 높이 같다. 내려다 보니 아찔한 벼랑길이다. 금탑봉이 병풍처럼 둘러친 벼랑 아래 지어진 응진전은 청량사 부속건물로서 청량사와 같은 연대에 창건되었고 원효대사가 수도를 위해 머물렀던 곳이라 한다. ‘진리에 응한다’는 뜻을 지닌 응진전은 석가모니불의 제자 중 궁극의 깨달음을 얻은 아라한 중에서 상수제자(上首弟子) 16명을 모신 불전으로 고려말 노국공주가 기도 정진한 곳이라 전해질만큼 그 위풍과 도량이 신비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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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청이 오랜 역사만큼 닳고 낡았지만 나뭇결에 남아있는 세월의 풍진이 손끝에 묻어난다. 고풍스런 응진전을 나서니 그 주위의 풍광은 더욱 빼어난 절경이다. 울타리가에 상사화, 나리꽃, 봉선화와 노오란 키장다리같은 여름꽃이 외로운 절주변을 퇴색한 단청보다 화사하게 수놓고 있다. 응징전의 아침을 뒤로 하고 아침공양을 하러 길을 되돌아 온다. 하산 준비를 하고 주지 스님인 지현 스님께 삼배를 올리려 하니 일배만 받으신다. 우린 귀한 연꽃차를 공양 받으며 스님의 향기로운 말씀을 들었다. 부처님처럼 온화한 미소를 닮으셨다.

 

폐사에 가깝던 절을 지현스님의 포교와 노력으로 청량사의 옛고증 자료에 따라 옛터의 그자리에 먼 강에서 모래를 나르고 침목을 져 날라 지금의 불사를 이루셨다 한다. 다녀 보면 여기저기 커다란 불사가 많다. 어울리지 않게 크고 거대한 한 것만 고집하는 볼성사나운 불사를 자랑스레 생각하는 예도 많다. 그러나 청량사에 와서 느끼는 것은 자연의 모습과 어긋나지 않게 산을 훼손하지 않고 그대로 다듬고 그 토대 위에 멋스런 노송처럼 산사의 서늘한 그늘을 만들고 있다는 것이다. 청량사가 오래도록 맑고 깨끗했으면 좋겠다고 하자 스님은 그런 노력의 일환으로 처음 산사 음악회를 열어 종파를 넘어 청량산의 푸르름을 지키기 위한 홍보와 지역의 많은 사람들과 청량산 환경 지킴이를 자청하고 계신다고 했다.

 

열악한 지역 사회복지와 산간 오지에서의 열린 포교를 위해 늘 바쁘신 지현 스님의 검정 고무신은 낡아 삼베로 꿰메었지만 그 헐거워진 신발이 청량산처럼 아름다웠다. 청량사가 맑고 푸른 도량인 것은 아마도 고루한 관습에 고여있지 않고 흐름의 세월속에서 끊임없이 맑고 청아한 순리의 샘물을 퍼 올리려는 바른 뜻에 있는 것 같다. 그러한 변화가 산속 오지에 있으면서도 처음 찾는 청량사의 인상이 전혀 낯설지 않게 산을 찾는 나그네의 마음을 사로잡는 것은 아닐까? 기약없는 떠남에 인사를 올리며 다음을 아쉬워 하자 올 핸 9.18일에 산사음악회가 있다고 전하신다. 자꾸 뒤돌아 보며 내려 오는 하산길에 어디선가 누리장 나무의 향기로운 꽃 냄새가 산바람을 타고 스친다. 산을 오를 때 반갑게 맞이하던 꽃향기가 잊지 말라는 언약처럼 하산길을 마중한다. 청량사의 꽃향기, 새소리, 물소리, 바람소리가 뒤를 따른다.



2004.8.7일 紫雲山

 

■ 이제 청량사 기행문을 마칩니다. 하루의 산중이 너무 길었나 봅니다. 이미 몸은 떠나와 톱니바뀌처럼 바쁜 일상에 맞물려 돌고 있는데도 마음은 깊은 산중을 배회하고 있나 봅니다. 자꾸 눈 앞에 산그늘이 내려와 골짜길 만드는 오후 입니다. 그동안 올려진 글들, 종교적인 관념보단 한 중년의 사내가 지친 속세를 잠시 떠나와 푸른 산에서 마음 씻어보는 하루라 생각하시길 바랍니다. 오늘이 입추입니다. 선선한 바람이 불때까지 가을을 위한 충전의 날이라 생각하시고 더운날들 잘 지내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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