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모래바람속에서 외로운 젊음을 보내며 타국에서 재산 1호로 마련했던 작은 오디오가 해마다 먼지가 쌓이며 장식품처럼 외로워진다 이슬람의 기도소리로 낯선 이방인의 거릴 헤메이다 레코드 가게에 『SALE』이란 쪽지가 붙어 있으면 혹 싸고 괜찮은 클래식음반이 있나 하고 뒤적이며 하나 둘 사모았던 오리지날 LP판도 365일 유리장 안에 갇혀 있다 마음의 감옥처럼 삭막했던 타국에서는 오직 음악이 위안이였다
그 중 유난히 바늘이 튀던 LP판이 어떤 것이였더라
드볼작의 현악사중주 "아메리카"가 아닐까 쥴리아드 현악사중주의 연주가 더 가슴을 에이고
겨울바람 소릴 내는데 그것은 구하지 못하고
아마 스메타나 현악사중주의 LP였지 혼자 끝도없이 가라앉는 날이면 크게 볼륨을 올리고 같은 악장을 수없이 반복하여 음악을 듣다보니 내 안의 슬픔이 레코드판에 깊은 상처를 새겨놓았다 어둔 영혼의 심지에 불을 밝히고 사막처럼 말라가는 황폐한 가슴을 적시는 것은 음악뿐이였다
세월의 골처럼 패인 상처를 지날 때처럼 아메리카의 2악장 렌토에선 지직거리는 신음소릴 내곤했다 그나마 바쁘다는 이유와 늘어지고 무관심한 세월속에서 부드러운 소릴내던 스피커의 울림판이 삭아내려
깊은 공명으로 울지않고 바늘은 무디어져
가슴 시린 카덴짜의 현의 떨림을 읽지 못한다 그래도 기계음처럼 차가운 금속성의 CD보단 LP판은 가을향기와 바람소리가 묻어 있어 좋은데 골동품처럼 밀려나 먼지속에 방치되어 간다
구석자리에서 잊혀진 사람처럼 자리한 나무괘짝을 열어본다 묵은 종이 뭉치에서 나프탈렌 냄새가 날아가자 차곡차곡 쌓여진 편지와 엽서에선 낙엽냄새가 난다
세월도 낙엽처럼 단풍이 들어선지 쌓여진 편지들이 칙칙하게 바랬고 펜촉을 콕콕 눌러 쓴 펜글씨의 편지들마다 조금씩 얼룩으로 번져있다 다양하고 세련된 필체와 글솜씨로 편지를 보내왔던 바닷가의 펜팔 친구의 편지에선 해풍과 파도소리가 들린다 얼굴도 모른 채 스무살이 지난 십여년 후에 그리움처럼 찾았지만 그 친구는 어느날 갑자기 젊은 나이로 고인이 되어
서해를 건너 먼 바다로 건너 갔다고 했다 초록색 펜글씨로 쓴 그의 편지도 남아 있었다
한지에 세필의 붓글씨로 물흐르듯 써 내려간 서찰도 있다 소백산 자락에서 사과와 인삼 농사를 지으시며 달빛 어린 시조를 쓰시고 소박한 선비같이 사시는 분이 보낸 편지다 오랜 한학의 연륜과 묵언으로 조용하시던 그 분은 수수한 시조가락처럼 마을의 노송처럼 청청하게 늙으셨겠지 궁서체의 편지와 시조가 마른꽃처럼 여위어 있는데
아직도 신선처럼 오지의 달밭골을 오르내리실까 한여름 풍기의 인삼밭에서 그 분과 보낸 기억의 한자락에서 지워지지 않는 솔바람 향기가 난다
내 스무살 푸른시절의 모든 추억을 담고 있는 괘짝안에는 열아홉 작은 소녀가 보낸 많은 엽서와 편지가 아직도 그 아름다운 시간의 기억과 설레임을 붙잡고 있다 또박또박 깨알같이 작은 글씨로 하루하루를 담아 보낸 편지들은 방황하던 나의 스무살을 무지개빛으로 물들였었다. 바하와 브라암스, 그리고 슈벨트를 좋아하고 전혜린과 김남조와 헷세를 좋아했던 그 녀는 이젠 그 녀를 닮은 작은 소녀를 바라보고 있을지도 모를텐데 지금은 어디서 이 가을의 낙엽을 보고 있을까? 그녀는 올해도 현충사의 황금빛 은행나무를 찾아가고 있을까
햇밀감이 나오는 초겨울이면 달고 새큼한 밀감의 신맛처럼 그 소녀의 추억이 가슴 가득 아련하게 고여온다 군시절 첫 휴가 때 처음 만났던 서울역의 역마차란 다방에서 그 소녀는 탁자에 다소곳 앉아 하얀 손수건을 펴 놓고 한웅큼 밀감의 껍질을 벗긴 후 실그믈 같은 속껍질마져 골라내어 주홍빛 속알맹이만 소담하게 담아서 말없이 내 앞에 밀어 놓았다 나 보다 앞 서 지갑에 동전을 가득 준비하여 거스름 돈 없이 버스비 같은 소소한 계산을 먼저하던 작은 그 녀 그 소녀는 지금도 그렇게 밀감의 향기로 살고 있겠지 만추의 비원을 거닐던 추억이 낙엽처럼 내 앞을 스친다.
세월은 나를 이름도 모를 먼 간이역에까지 데려왔지만
영혼을 깨웠던 추억은 변함없이 그 자리에서 손을 흔든다 낙엽을 따라 온 길이 아득하지만 지금 돌아 보니 어제와 오늘이 내 안에서 공존하는 꿈만 같다 나의 미래가 결코 소중했던 과거를 상쇄시킬 수 없는 지금 내 묵은 서랍속의 가을은 외롭고 쓸쓸했지만 나를 키우고 방황하게 했던 꿈으로 가득했기에 아름다운 향기와 그리움으로 깊어간다.
2003.11.5일. 먼 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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