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저녁으로 느끼는 빛의 농도와 파장이 점점 낮게 가라앉는다. 공원에 심어놓은 사루비아의 다홍빛이 가을햇살에 드러나 더욱 붉게 탄다. 오가며 지나치는 창 밖의 풍경이 하루가 다르게 푸른빛을 낮추며 퇴색의 옷깃을 여미고 선선한 바람은 가을 들녘을 누우렇게 헤집고 다닌다.
이제 다음 주쯤엔 시월의 산은 그 고운 단풍의 옷고름을 풀고 오색의 화려한 자태를 드러내는 장관을 연출할 것이다. 꽃 소식은 남쪽에서 북으로 올라오지만 단풍 소식은 북에서 남으로 내려가니 항상 산은 우리 모르게 남북교류를 하고 있었나 보다. 눈 들어 내다보면 푸르른 창공의 시린 하늘빛에 빠져 가을서정은 점점 높아져 가고 마음은 가을걷이로 무르익은 들판을 거닐며 지평선 끝까지 달려보고 싶어진다. 어느 기자가 추수가 한창인 만경평야의 모습을 아름다운 조각보 같다고 했다. 아주 적절한 표현인 것 같다. 그 만경평야의 끝자락에서 가을의 서정에 마침표를 찍고 싶어지는 마음이다.
개천절 아침부터 주름진 노모의 가을걷이가 시작되었다. 유난히 봄 가뭄과 늦장마로 혼이 난 농작물들이지만 가을이 되니 그들도 생의 마무리를 위해 무거운 머릴 숙이며 여름내 열어 놓았던 씨방의 빈자리를 채우고 있었다. 가을은 그렇게 논밭자락을 거두며 깊은 산 속으로 떠날 채비를 서두르고 있었다. 풀풀 날리던 마른 밭에 병아리오줌 같은 물을 뿌리며 심어 놓으신 조, 수수, 들깨 모종이 그 억센 생명력으로 키를 넘게 자라나 굵은 이삭을 꽃피웠으나 모진 태풍에 쓰러져 반은 제대로 여물지 못한 채 쭉정이로 누워있지만 그래도 어머님은 대견해 하신다.

이미 수수모가지는 잘라 한마당 널어 말려 알곡을 만드셨고 오늘은 조 이삭을 자르고 계셨다. 누우렇게 여문 조 이삭은 제법 묵직한 무게를 느낀다. 한 가을 조 밭은 그 정취가 더없이 목가적이지만 쓰러져 누운 곳이 많아 그 서정이 아쉬운 풍경이다. 생각할수록 정직하고 신비로운 것이 농작물이다. 어쩌다 지나쳐봐도 그들은 묵묵히 제 모습을 지키며 혼자 열매를 키워가고 있었다. 그 약속을 아시는 노모는 목숨처럼 그들을 사랑하신다. 생명줄이 가늘어질수록 그 집착은 더 강해지시는 것 같다. 아직도 낟알 하나 이삭 하나를 보면 주워서 허리춤에 달고 오신다. 이제 당신의 정성으로 여문 조이삭을 잘라 부대에 담고 계신다.
옆에 있는 김장 밭의 조금씩 심은 무, 배추가 한창 잎이 벌어 꽃 포기처럼 싱싱하고 푸르다. 오전 햇살의 청량한 기운이 쇠할 무렵 건너 텃밭을 돌아 본 할머님이 오셨다. 누구 일 이랄 것 없이 앉아서 노모와 같이 조 이삭을 자르신다. 이미 밭을 매며 알고 계신 사이지만 두 분의 다정함이 이웃의 정처럼 느껴진다. 함평이 고향인 할머니는 옛 고향의 추억을 떠올리며 옛이야기를 멍석 가득 깔아 놓으신다. 잰 손놀림으로 이삭을 자르며 도리깨로 나락을 쪼아먹는 참새를 때려잡은 이야기며, 볏광에 줄줄이 숨어든 쥐새끼를 잡은 이야기에다 고향의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놓으신 할머닌 연신 자릴 옮겨가며 신이 나셨다. 어느새 젊은 날의 새악시가 되어 꽃 같던 추억을 수놓으시고 덩달아 얘기 손님을 맞은 노모는 어느덧 인생의 긴 자락을 펼치며 그 추억을 주워담고 계셨다.
오후 두시를 넘은 햇살의 각도는 아름다운 빗살무늬다. 그 나직한 햇살 속의 들길을 나서니 풀꽃 향기가 은은하다. 쑥부쟁이가 하얗게 피었고 들쑥의 향기도 그 진함이 시들어 코 끝의 거릴 좁힌다. 길길이 자라던 바랭이와 쇠비름, 마디풀도 이미 그 줄기가 쇠잔한 채 단풍이 들었다. 밭둑을 어지럽게 넝쿨손을 뻗던 호박순이 무성했던 잎을 떨구고 그 끝에서 어린 새순을 뻗고 있고 달덩이처럼 둥근 늙은 호박이 삶의 배꼽을 내놓고 살색의 알몸을 굳히고 있다. 늙어갈수록 부끄럼 없이 자신을 드러내놓고 단단하게 여물어 가는 호박마저 이 가을은 지혜와 배움을 준다. 무서리가 오기 전 알뜰히 열리는 귀여운 애호박의 살결이 반들거리게 윤이 나고 연두빛 식욕이 자르르 흐른다. 오늘 저녁은 뚝배기에 자작자작하게 된장을 끓여 애호박 숭덩숭덩 썰어 넣어 가을의 끝물에 선 미각을 맛보아야겠다. 이런 생각을 삼키며 이젠 누렁 잎이 지는 들깨 밭을 들어섰다.

<한국화가 김호석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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