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 숲에서 오솔길까지

내 삶의 소강상태에서

먼 숲 2007. 1. 26. 0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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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내 삶의 소강상태에서 』



    긴 雨期를 지나 언뜻 내 비친 하늘이 명쾌한 푸르름으로 다가섭니다.
    한동안 무거운 중량의 구름과 엄청난 장대비를 쏟아 낸 하늘은 체증을 거두어 낸 가벼움으로 텅 빈 느낌입니다. 그렇게 비워 낸 하늘의 먼 가장자리부터 가을이 물들어 오고 있나 봅니다. 비가 그친 이후론 새벽 바람이 선선해 자꾸 이불깃을 끌어 당기게 되고 끈적이던 살갗이 부드러워진 듯 합니다. 이제 서서히 마른 바람이 불고 기울어진 햇살의 각도로 젖은 여름의 습도를 지울 것입니다.


    참으로 올 여름도 엄청난 비의 계절이었지요. 이젠 해마다 그 게릴라성의 폭우로 순식간에 몰아치는 수해를 걱정해야 하고 되풀이되는 재앙을 겪어야 하는가 봅니다. 예전에도 태풍이 올 때마다 상습적인 수해를 겪곤 했지만 올해는 작은 마을이 아닌 소도시가 물에 잠겨 둥둥 떠 있는 섬이 되는 물난리를 겪게 되는군요. 그게 다 우리 인간이 자연을 훼손한 악순환의 대가라는 점이 심각한 문제로 제기되고 있는 요즘입니다.

    낙동강의 수해지역에 근 열흘이 넘어서야 물이 빠진 큰 길로 밀어낸 산더미 같은 저 쓰레기도 어마어마하지만 수마의 상흔 앞에서 느끼는 절망감은 얼마나 클까요. 언제나 그런 재앙은 욕심없이 사는 농촌이나 어촌을 할퀴고 지나갑니다. 올핸 작은 공장지대까지 고스란히 물에 잠겨버렸더군요. 그런대도 이런 민생의 아픔과는 아랑곳없이 연일 밥그릇 싸움으로 저주스런 입씨름만 하는 썩은 정치권이나 부패한 재산을 쌓고도 더 뻔뻔하게 욕된 부를 누리며 나 몰라라 하는 일부 부유층들은 왜 하나도 그 홍수에 씻겨 내려가지 못하는 것일까요. 어쩌면 그러한 오욕의 때를 말끔히 벗겨 갔으면 하는 바램은 유치한 생각인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상반된 삶의 모습이 이 세상사가 아니던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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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과나무의 초록 열매들이 집중호우로 포탄이 떨어진듯 땅바닥에 나뒹굴고 있습니다.
    아직도 고기압의 기류는 불안한가 봅니다. 큰 비는 아니겠지만 지금도 무거운 저기압골이 머물러 있는 잠시 소강상태입니다. 갑자기 그 소강상태라는 의미가 요즘 새롭게 들립니다. 마치 내 나이 사십대가 인생의 소강상태나 휴지기는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더군요. 여름처럼 열정으로 들떠있던 젊음을 보내고 이제 사 잠시 생을 되돌아 보며 내 흔적을 볼 수 있는 지금의 시기가 긴 장마 끝에 잠시 잠잠해진 소강상태처럼 느껴집니다. 그렇게 생각하니 만약 지금 내게 남겨진 아픈 상처가 있다면 내 스스로 치유하면서 삶의 위험수위는 서둘러 조절해야만 하는 힘겹고 고단한 때가 아닌가 합니다. 가을이 오기 전 잠시 이 소강상태를 우린 조용히 점검해야하나 봅니다.


    언제나 자연은 보이지 않는 약속을 어김없이 지켜줍니다.
    그 긴 雨中에서도 곡식은 여물어 열흘 전에 이른 참깨를 베어 가지런히 세워 놓았습니다. 장마라 벌 나비도 오지 않아 수정이 안된 호박은 넝쿨만 뻗고 있는데도 참깨는 다 제 목숨길을 알아서 그 빗속에서도 씨가 여물고 있었나 봅니다. 일찍 심은 것은 자연의 약속처럼 그 시간만큼 빠르게 제 몸을 거두고 있었고 벌써 한여름 줄기차게 치솟던 풀섶의 질긴 잡초들도 풀 씨가 달리면서 청청하던 잎을 말리고 있더군요. 그러나 주렁주렁 익어가는 고추는 연일 퍼붓는 비에 제 몸을 말리지 못해 습진처럼 썩어 우수수 떨어져 있습니다. 잠시 비가 그친 사이 노모는 그 복중에 벌써 김장 심을 준비로 땀을 비오듯 쏟아내며 씨를 넣습니다. 이렇게 절기는 생의 순간순간을 준비하고 마무리 하면서 내 목숨길을 순리처럼 살아가게 하고 있었습니다. 나도 그 보이지 않는 자연의 약속을 순리처럼 따라가고 있었나 봅니다.


    낼 모레가 처서입니다. 어느 새 퇴근길의 해 길이가 짧아짐을 느낍니다.
    미등을 켜는 시간이 빨라져 가고 귀가길의 저녁노을을 보는 거리도 점점 짧아집니다. 여름의 그늘을 지나 늦은 상사화가 피었고 화려했던 여름 꽃들이 송아리 째 떨어져 시들어갑니다. 이슬이 맑아지는 아침마다 나팔꽃이 가을을 향해 피고집니다. 이 모든 계절의 상실감은 또 새로운 기다림으로 다가오고 있습니다. 여름은 구석마다 습한 냄새를 풍기고 눅눅해져 있었지만 가까워진 가을을 생각하니 벌써 마른 풀 냄새로 깊어져 갑니다.


    비록 다시 낭만을 꿈 꿀 수 없는 나이인지도 모르지만 여전히 그리움만은 뭉게구름처럼 마음 위를 떠갑니다. 그리움은 더 깊어져 가는 추억으로 결코 소진되지 않는 감정인지도 모릅니다. 이제 사는 게 목가적이지도 않고 때론 허무하다는 것도 압니다. 더 이상 도피할 곳도 없는 벼랑이라 생각할 때도 있지만 내게 주어진 길이라 생각합니다. 또 다시 삶의 홍수가 밀어 닥칠지 모르지만 가을은 내 삶의 소강 상태라 생각하고 누추하고 헐거워진 마음을 조이고 눅눅해진 마음을 말갛게 헹구고 널어 말리고 싶습니다. 부패되고 곰팡내 나는 마음의 창을 열고 덧문엔 한아름 들꽃향기라도 걸어놓으려 합니다. 살수록 가난해지는 마음이지만 가을엔 시들지 않는 쪽빛의 로멘티스트가 되어보고 싶습니다.
    장마가 끝나 가는 팔월의 언덕 끝엔 마른 바람이 불어 옵니다.


    2002.8.21 추억의 오솔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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