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개 학 』
조석바람이 선선해지면서 아침 출근이 상쾌해집니다 먼 대륙을 건너오는 계절의 옷자락이 언뜻 서늘한 바람으로 스쳐가는 요즘 끈끈했던 살결들이 벌써 새로운 느낌의 변화를 예감하나봅니다 끓어 오르던 열기가 식어가며 점점 은근해지는 기운들이 서서히 가을로 향한 방향으로 몰려가고 하늘과 구름과 바람이 높아졌습니다 반면 햇살은 그 빛의 깊이와 농도가 낮아져 하늘의 추녀끝에서 마당까지 비스듬한 예각을 이룹니다
오랜만에 가벼운 편지가 쓰고 싶어져 며칠 째 부드러워진 녹색의 벌판을 내다봅니다 기세좋게 치솟던 풀섶의 잎 끝이 말라가고 휴가끝의 해변도 텅 비어가고 뜨겁던 모래가 식어갑니다 즐거운 방학임에도 불구하고 종일 방과 학원을 오가는 가여운 요즘 아이들도 얼마 있으면 곧 개학이더군요 여름이 끝나가는 시점이면 방학이 끝난다는 서운함보다 새로운 학기가 시작되는 개학을 기다리던 설레임이 마치 가을을 기다리는 그리움과 맞물려 지나는 것 같은 느낌입니다.
그러나 살다보니 이 짧은 인생이 방학도 없고 새로 시작해 보고 다짐해 보는 개학도 없다는 것에 쓸쓸해집니다. 여름내 그을린 까만 얼굴들을 마주보며 잘 여문 옥수수같은 하얀 이빨을 드러내며 웃던 해맑은 웃음들이 껑충해진 의자에 앉아 시끄럽게 떠들어대는 개학날 교실의 유리창은 그 푸른 아이들의 재잘거림과 구월의 파란 하늘빛에 질려 쨍그랑하고 즐거운 파열음으로 깨져갔지요 돌아올 수 없는 순간들이지만 구월이 되면 나도 개학을 앞 둔 설레임으로 마음의 소리가 한 톤 높아집니다

지금도 방학을 맞은 언덕 위의 그 학교엔 허리가 한아름되는 늙은 느티나무가 운동장을 지키고 있을까요? 사방치기,땅따먹기,자치기를 하면서 넓다란 운동장 여기저기 그어논 어지러운 낙서들을 아이들이 돌아 간 오후 빈 나무 그림자로 지우다가 혼자 심심해 시끄러운 매미를 불러 합창을 하던 느티나무가 아직도 먼 기억의 운동장에서 가을을 기다릴까요? 흰 벽의 강당 앞에도 백 년 넘게 묵은 은행나무가 맷방석처럼 둥근 그늘을 만들고 있었는데 올해도 주렁주렁 노란 은행이 달렸을까요?
한동안 조용하던 학교에서 행진곡이 들려 옵니다. 개학이 되어 지루한 아침 조회가 끝나면 경쾌한 사분의 사박자의 리듬에 맞춰 아이들은 가벼운 보폭으로 운동장을 행진하겠지요 아직도 콰이강의 다리나 무궁화 행진곡 어린이 행진곡이나 라데츠키 행진곡을 들으면 신나고 명랑해집니다 규칙적인 박자에 맞춰 교실로 들어가 반가운 학우들과 앉은뱅이 책상에 나란히 앉아 말끄러미 선생님을 바라보고 싶어집니다
개학을 하고 여름이 지난 하교길의 행길가엔 무궁화가 피고지거나 코스모스가 일렬로 늘어서서 피었지요 먼지나는 행길엔 긴 미루나무 그림자가 엇갈려 그로테스크한 그림을 그리고 그 길을 따라 이어진 논둑길엔 방아깨비, 메뚜기들이 이쪽 저쪽 넘나들며 정신없이 높이뛰기를 했었지요 그 때처럼 어김없이 가을로 가는 들판은 서둘러 여름을 마감합니다 층층으로 줄기차게 피어나던 달맞이꽃,접시꽃,봉숭아가 여름내내 피었던 꽃자리마다 둥근 씨방을 만들고 멀쑥하게 키가 큰 참깨도 층층이 여물어 갑니다 꽃이 진 자리를 따라 바람이 머물고 가을이 오고 있나 봅니다
어느새 나의 유년시절은 한 생애의 전설속으로 사라지고 방학도 없는 생의 여름을 지나 가을을 준비해야 합니다 내가 자란 마디마디의 시간을 따라 아이들이 그 시절을 자랍니다 방학동안 풀섶을 메뚜기처럼 뛰어 다니던 시절도 아득한 추억이 되었지만 다시 한 번 유년시절처럼 개학을 맞이하고 싶어집니다 그동안 밀린 세월의 일기도 꼬박꼬박 쓰고 인생을 몰라 허둥대며 허비한 채 밀려버린 숙제도 밤 세워 하며 새 학기의 각오와 설계도 새롭게 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가을 하늘처럼 맑고 파란 마음으로 생의 설레임으로 두근거리는 개학을 맞이하고 싶어집니다
2003.8.24일 먼 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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