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상처라는 쓰라린 이름마져도 』
하늘빛 바람의 중량이
잠자리 날개처럼 가벼워졌다
명주올처럼 가늘어진 바람결이
오후엔 낮은 들녘까지 내려와
마른 풀섶을 쓰다듬는다.
적어도 가을바람이 부는 동안은
상처라는 쓰라린 이름마져도
붉은 석류알처럼 눈부시다
오히려 상처라는 아픈 자리가
잘려진 탯줄이 아문자리처럼
존재의 각인으로 선명해진다.
세파의 물살에 터지고 곪던 부위들이
절망과 권태의 늪에서 흐르던 진물들이
상실과 소외감으로 얼얼하게 아프던 멍자국까지
가을바람이 불면 꾸둑꾸둑 말라가며 아문다
스스로 치유할 수 있는 면역성으로
가슴은 단단해지고 마음은 맑아져간다.

돌이키고 싶지 않던 기억들이
잊고 싶던 아픔의 자국들이
슬픔이라 하여 묻어두고 싶던 추억들이
모두가 굳어진 상채기의 딱지를 떼고
새살처럼 솟아나 나를 바라본다.
돌아섰던 시간들이, 버렸던 세월들이
먼 간이역을 돌아 내게로 왔다.
나를 키운 바람속에서 향기가 난다
들국화 향기 같기도 하고
솔잎 향기 같기도 하다
새털구름처럼 가벼워진 바람이 부는 동안은
음지식물처럼 얼굴을 가리던 아픔들이
향긋한 과육으로 빨갛게 익어
투명한 가을햇살에 여문 아람이 되었다
2003.9.1일. 먼 숲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