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 숲에서 오솔길까지

조락의 계절에 듣는 憂愁의 노래

먼 숲 2007. 1. 26. 07:14

 

 

 

 

 





『멜라니 사프카』



Melanie Safka의 명곡 The Saddest Thing은 아직도 여전히 흐리거나 비오는 날엔 자주 방송에서 흘러나오며 풋풋한 감수성을 자극하거나 이별의 아픔을 대변하며 처절하게 흐느낀다. 이 세상에서 가장 슬픈 일은 뭘까요? 가장 슬픈 일은 아마도 사랑하는 사람에게 이별을 고하는 것이 아닐까요? 하는 슬픈 가사의 노래를 그 녀는 가슴을 헤집는 듯한 허스키한 목소리로 우리의 심금을 울리는 명곡이 되어 지금도 세상에서 가장 슬픈 노래라는 변함없는 사랑을 받고 있다. 그리고 노래 한 곡이 이렇게 모든 사람의 마음을 흔들 수 있는 불멸의 언어가 된다는 것에 놀라울 뿐이다.


나 역시 순수했던 십대엔 이별의 아픔도 없이 그 노래를 들으며 우울해 하기도 하고 마음이 슬플 땐 마치 쓰라린 이별을 한 듯 그 노래를 들으며 젖은 감상에 빠지곤 했다. 그러나 난 그 녀의 다른 노래인 "Lay Down" "Ruby Tuesday" "The Nickel Song" 같은 노래를 들으면 슬픔을 벗어나 강한 샤머니즘에 빠지는 듯하다. 그것은 아마도 우수에 젖은 듯한 목소리로 때론 처절하게 때론 흐느끼듯이 외쳐대는 깊은 울림과 반복적인 리듬때문인지도 모르지만 그 녀의 목소린 영혼을 부르는 듯 깊고 어둔 메아리가 있다. 절규에 가까운 그녀의 외침과 애조띤 파장은 많은 사람들의 깊은 가슴속까지 퍼져 눈물샘을 자극하기도 하고 위안이 되었다.

그러한 노래의 메아리는 마치 남미 안데스 산맥을 넘는 거칠고 신비스런 인디안처녀처럼 멜라니 사프카는 처연한 삶과 먼 영혼을 이어주는 주술적인 힘을 느끼게 하는 강한 호소력으로 다가와 끝내 우울과 슬픔을 거두어 내며 아픈 상처를 달래주곤 했다. 그 녀의 노래는 마치 영혼을 불러내는 巫女가 부르는 살풀이가 되기도 하고 우리의 恨을 노래하는 타령처럼 절절하고 구슬프기도 하지만 때론 아픈 마음의 상처를 달래주기도 하고 깊이 가라앉은 고독까지 토해내 슬픔을 얘기하게 하며 마침내 눈물의 카타르시스를 느끼게한다.

 

 

 

 

 

 

『존 바에즈』


Joan Baez는 반전평화운동가이자 인종차별에 반대하며 노래활동을 하는 세계적인 포크의 여왕으로 더 알려졌지만 그녀의 노래 "DONNA DONNA"는 내가 제일 먼저 접한 팝송이 아닌가 싶다. 그 노래는 중,고등학교 시절 박인희씨의 노래로 더 친숙했지만 존 바에즈의 맑고 투명한 목소리로 부르는 " The river in the pines"은 내 푸른 시절의 한 복판을 흘러간 노래이며 내 마음의 抒情이고 詩였다. 알 수 없는 그리움이 번지던 열일곱의 봄 날, 그 순수의 순간마다 난 밤 안개가 피어 오르는 저수지길을 걸으며 수없이 그노래의 아름다운 멜로디를 흥얼거리곤 했다. 가슴에 차 오르는 그리움을 달래려고 물새가 헤적이는 물가에서 그 녀의 노래를 부르면 마음속엔 영롱한 물소리를 내며 작?시냇물이 흘렀다.

어느 인터넷의 한페이지에 "그녀의 목소리는 처연하면서도 기품이 있고, 윤기가 흐르면서도 거만하게 들리지 않는, 쥐어짜는 음색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고, 힘차게 부르는 노래에도 편안하게 기댈 수가 있다."라고 존 바에즈의 노래에 대해 서술되어 있었다. 통기타 하나에 부르는 그녀의 노래는 어떤 유명한 오케스트라의 교향곡보다도 크고 신비로운 힘과 영혼의 소릴 듣게 하는 마력이 있다. 그 녀의 노래는 때론 지적인 품위와 강한 멧세지를 전달하고 마치 시들지 않는 자연의 노래 같기도 하다. 멜라니 사프카가 거칠고 메마른 안데스 산맥의 인디언 처녀라면 존 바에즈는 깊고 푸른 로키산맥의 골짜기에 사는 인디안 처녀 같은 신성함과 청명함을 느끼게 한다.

검고 치렁치렁한 긴머리와 검은 눈동자를 가진 그녀가 청바지에 통기타를 매고 노래하는 히피적인 모습은 은연중 폐쇄된 우리의 70년대에 자유라는 저항정신에 불씨를 당기게 했을 것이다. 애수 띤 그녀의 높고 맑은 목소린 그 당시 내가 좋아했던 쥬디콜린스의 지성적인 느낌과는 다르게 전율을 느끼게 하는 힘있고 자유로운 외침이 되어 때론 히피처럼 방랑과 열정으로 살고픈 동기를 부여하기도 했다. 또한 그 녀의 노래는 어둡지 않고 슬프지도 않아 아직도 내겐 빙하의 골짜기를 울리는 영혼의 목소리가 되어 낭낭하게 들려온다. 존 바에즈의 노랜 아직도 나를 늙지않게 한다.

 

 

 


 

 

 

 

『아말리아 로드리게스』

Amalia Rodrigues의 음악은 삼십대에 들어 좋아했지만 그만큼 세파를 건너 온 세월의 뒤안길에서 느낄 수 있는 연민과 추억의 노래인지도 모른다. 생소했던 그녀의 음악을 떠 올리게 하기 위해 여기 인용해 온 글에서도 그러한 세월의 어둠이 스며든다.
『검은 옷에 검은 숄을 걸친 여가수가 무대에 서서 두 손을 모은 채 노래를 부른다. “사랑은 비틀거리는 발걸음 미쳐버린 눈길 눈물의 향연 차갑게 식어버린 빛이라네 더 이상 사랑에 대해 노래하지 말아요….” 애수어린 가사와 흐느끼는 듯 처연한 목소리, 그리고 기타 반주가 검푸른 바다를 연상시킨다. 포르투갈의 민요‘파두’(Fado)의 연주 장면이다. 우리에게는 아말리아 로드리게스의 ‘검은 돛배’ 정도로만 알려진 음악이지만 어딘지 모르게 낯익은 것은 여러 드라마나 CF에서 파두를 배경음악으로 사용했기 때문이다.』

내가 이 음악을 처음 들은 걸 기억하기론 오래 전 라디오에서 서남준이란 음악평론가가 세계의 민속음악을 소개할 적에 들었던 것 같다. 그 당시 처음 "검은 돛배(Barco Negro)"를 들을 적엔 난 충격에 가깝게 아픈 전율을 느꼈다. 둥둥둥 거리는 먼 북소리가 다가 오면서 시작되는 그녀의 목소린 恨과 몰입의 경지에서 부르는 노래였다. 우리의 가락인 중중모리나 자진모리 같은 장단처럼 시작된 노래는 마지막엔 아득한 수평선을 향 해 멈추지 않는 통곡처럼 들려와 너무 아프고 절절했다. 그 소린 아련한 망각의 기억을 일깨우기도 하고 쓰디쓴 그리움이 아로새겨진 가슴 아픈 넋두릴 토해내는 것 같았다. 혹자는 Fado를 부르는 아말리아 로드리게스를 "담배 한 대가 간절하게 만드는 여자" "술에 취하고 싶게 만드는 여자" 라고 어떤 음악칼럼에 적어 놓았다.

그것은 고혹적인 선창가의 불빛같은 음울한 음악의 분위기 때문일 거다. 검은 드레스를 입고 흑장미 같은 노래를 하는 가수는 전설적인 프랑스의 샹송가수 에디뜨 삐아프나 줄리엣 그레꼬만 있다고 생각했었는데 그 녀 또한 검은 옷을 입었다고 한다. 그러나 샹송이 사랑과 낭만의 여유와 쓸쓸함을 노래했다면 파드는 삶의 아픔과 한을 노래한 것 같았다. 감당할 수 없는 바다와 싸우는 삶에서 감당키 어려운 생의 아픔을 노래하는 Fado는 샹송과 달리 우리의 정서와 닮아 있었고 그녀의 노래를 들으면 진도 씻김굿을 떠 올리게 한다. 그녀의 노래는 밀려오는 파도다. 슬픔을 함락시키며 망망대해를 가르며 다가오는 검은 돛배다.


2003.11.23 일 먼 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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