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이월!
벌써 사나흘 흐린 하늘 사이로 십이월이 지나가고 있었는데 한동안 십이월이란 짧은 감각을 잊고 있었습니다. 십이월의 거리는 춥고 황량하지만 군고구마나 군밤,호떡이나 붕어빵의 구수한 냄새와 오뎅국물에서 피어오르는 따스한 김이 마음의 창에 서려 종종걸음을 치면서도 따스한 체온과 인정을 더 그리웁게 합니다. 언제나 십이월은 보이지 않는 낮달처럼 허공에 걸려 떠나가는 뒷모습만 바라보는 빈 달이였나 봅니다. 세월의 흐린 하늘속에 떠 있는 달무리였나 봅니다.
그런데 디?버란 외국어가 똑같은 계절언어로서 십이월이란 말보다 강하게 시린 마음자락으로 한 계절의 느낌을 환기시키며 카렌다의 멋진 설경처럼 새롭게 자리매김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십이월하면 그저 쫓기듯 한 해의 끝에서 마무릴 하느라 수첩정리를 하고 주소록에서 하나 둘 잊혀져 가는 이름을 지우며 그리운 사람은 이월 정리를 하고 전화라도 해볼까 하면서 궁금해 하기 보단 나를 잊지 않았을까 하며
나의 존재를 알려주고 싶어집니다. 살수록 내가 남을 잊기보다는 오랜 기억속에서 내가 잊혀져 가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이탈감과 소외감이 느껴지기도 하지요.

십이월엔 돌연 묵은 통장을 정리하며 빈 통장의 잔고에서 허탈해 하거나 통장내역에 적혀 나오는 한 해의 사라져버린 넋두릴 훑어 보며 사는게 겨우 이렇게 매스컴에 올려진 최저 생계비를 웃도는 정도의 급여액과
그 입급된 금액만큼의 똑같은 분할 내역으로 한달이 마감되는 반복을 보며
허탈하기 전에 일그러진 삶의 대차대조표를 보는 느낌이 되고 맙니다 변화없는 셀러리맨의 비애라 생각하기엔 이미 사는 걸 알아버려 어느 삶인들 쉽고 편하겠는가 하는 통념으로 나를 위무해 버리지요.
대출이자에 보험료,학원비,관리비와 공공요금의 자동납부액만 찍혀지고 찔끔찔끔 소액으로 인출된 자동인출기 금액만 새끼줄처럼 꼬여 있을 뿐 입금 된 잔액의 금액은 언제나 까치밥처럼 가난하기만 하니 공연히 부자라는 의미의 포만감이 부럽고 심사가 뒤틀리는 달이기도 합니다. 십이월이란 시간의 개념은 이렇게 셈하기 싫은 숫자와 한 해의 종결이라는 의미에 쫓기는 초조감으로 뭉그러져 가는 느낌이지만 똑같은 절기의 디�버에서 느끼는 어감과 의미는 제게는 다르게 느껴집니다.

디쎔버!
그 언어의 철자 하나하나가 초록과 빨강의 휘장을 엮어 화려한 네온으로 밝혀지고 도심의 중심마다 반짝입니다. 감사와 안식의 느낌으로 밝은 촛불처럼 타오르기도 하고 때론 금박은박으로 잘 포장 된 디�버란 이름의 선물꾸러미로 눈부신 백화점의 쇼케이스에 진열되어 있기도 합니다 아마도 크리스마스란 이름이 아직도 동화속처럼 기억되어 그런가 봅니다.
그리고 내겐 디쎔버는 방랑의 종소리처럼 경쾌한 말발굽 소리나 마차의 방울소리로 때론 먼 떠남의 종소리로 다가오기도 하지요. 디쎔버란 계절은 러시아의 설원을 달리는 눈썰매에 나를 싣고 모스크바나 상트뻬떼스브르크 같은 낯선 이름의 옛 도시로 떠나거나 회색의 우울과 눈부신 설원에 펼쳐진 한겨울의 낭만을 찾아 울울한 전나무 숲으로 둘러 친 눈 쌓인 마을로 깊이 들어가 벽난로에 장작불을 지펴 놓고 활활 타오르는 페치카의 온기에 기대어 긴 안락의자에 누워 오래 된 시집을 읽거나 러시아소설을 읽으며 고서에서 풍기는 책냄새를 맡고 싶어집니다.
가물가물 벽난로의 불그림자가 어룽거리면 바하의 무반주 첼로곡이나 슈벨트의 겨울나그네의 L.P를 올려놓고 피셔디스카우의 깊고 저윽한 바리톤의 선율에 눈을 감아보기도 합니다 때로는 조지 윈스턴의 "디쎔버"의 음악을 오바코트 깊숙히 넣고 눈이 오는 마을을 찾아 겨울나그네가 되어 한적한 중앙선 기차를 탑니다. 묵상의 겨울산 사이로 살얼음이 눈부신 남한강을 따라 가며 갈대숲에서 날아 오르는 철새들의 자맥질에 마음을 담그고 갈색의 시들은 풀섶을 따라 낮은 겨울햇살을 받으며 켜켜히 마음에 쌓인 한 해의 시름을 벗어 버리고 싶어집니다.

십이월이란 공간에선 지난 추위와 웅크린 자신의 어둔 자화상이 문풍지를 흔드는 바람처럼 캘린더 한장에서 펄럭이지만 디쎔버란 공간에선 새해를 기다리는 설레임과 한 해의 무사함에 겸허함으로 감사하는 마음의 교차점이 있지요. 묵은 후회나 아쉬움을 버리고 마음에 포근한 목도리를 두르고 흰 눈이 쌓인 설경의 창 밖을 내다보며 버려야 할 것, 잊어야 할 것을 성에 낀 유리창에 썼다가 지우며 마무리의 막을 내리고 새로운 이름과 희망을 쓰고 싶어집니다
새 감각으로 겨울햇살에 반짝이는 스케이트 날같은 날렵한 필체로 살얼음처럼 신선한 생각과 각오로 크리스탈처럼 빛나게 "GREETING" 이렇게 명징한 언어를 쓰고 싶어집니다. 마지막 남은 시간의 여백에서 십이월이란 현실의 한 장을 정리하여 아쉬움 없이 보내고 그 허한 마음의 공백을 디?버란 내 나름의 여유로운 여백에서 새로운 희망과 감사의 은종을 울리고 싶습니다 밖에는 어느새 어수선한 한 해에도 불구하고 캐롤이 울리고 성탄절을 위한 오색빛 네온과 장식으로 따슨 불빛을 밝히며 묵은 해가 저물며 가까운 곳에 새해가 밝아 있습니다.
2001.12.5일. 추억의 오솔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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