隱居를 꿈꾸다

수몰된 유년의 기억을 찾아

먼 숲 2012. 7. 12. 18:41

 

 

 

 

 

 

 

 

 

 

 

 

 

 

 

해마다 여름이면 먼 남쪽으로부터 온 무서운 태풍이 휩쓸고 갈 적마다

망가지고 유실된 황폐한 여름의 잔해들이 어지러웠다

세월의 격랑은 예측할 수 없는 비바람속을 살면서 벌써 반세기가 흘렀고

물무늬처럼 아롱지던 유년의 아름다운 기억은

 오랜 세월에 수몰되어 침잠의 물속에 잠들어 있다

그리움의 물살이 산들바람에 헤적이는 여름날엔

수몰된 유년의 추억이 말갛게 물그림자처럼 아른거린다

왜 유난히 어린시절의 기억은 여름날의 추억에서 존재하는 것일까

흑백사진처럼 떠올려지는 기억속의 어린 나는

상고머리에 고무신을 신고 허름한 런닝에 반바지를 입은 촌스런 아이다

그 시절 여름을 지나는 대부분의 시골아이들 모습이 그러했던 것 같다

 

비가 그치고 하늘이 개이면 제일 먼저 찾아 오는 건 잠자리다

해가 나기 시작하면 마당을 뱅뱅돌며 하늘 높이 비행하다 헬리콥터처럼

뒤란 바지랑대나 빨랫줄에 살포시 줄지어 착륙해 앉아 있었다

살빛 상사화가 핀 뒤꼍 빈 자배기엔 빗물이 고여 푸른 이끼가 자라고

물속엔 장구벌레들이 연못인줄 알고 마냥 까불며 헤엄치며 놀고 있었다

비 그치자 텃밭에서 시끄럽게 울던 청개구리 소리도 그치고

어디 숨어있었는지 보이지 않던 못생긴 두꺼비나 맹꽁이가

어슬렁 어슬렁 거리며 느리게 마당가를 가로질러 봉숭아 꽃밭으로 숨었다

서너차례 퍼붓던 소나기가 처마밑에 모여 작은 개울을 만들고

여울진 빗물이 흙마당에 도랑을 내며 흘러가면

우린 지구본처럼 둥굴던 씨방을 떨군 빈 대파 대궁을 이어

길게 토관을 묻고 흙탕물이 댐처럼 관을 통해 흘러내리는 물놀이도 했다

 

둑방 개울이 넘치거나 논두렁마다 물꼬가 터지면

어른들은 지게로 흙을 퍼나르고 바쁘게 소나무를 잘라다 둑을 막고

형들은 어레미나 족대를 들고 물고길 잡으로 냇가로 몰려 갔다

어린 애들은 작은 도랑이나 개울에서 송사리를 잡아 고무신에 넣어 놀거나

지느러미와 꼬리가 오색 무지개빛이 도는 버들붕어를 잡아

 사이다 병에 넣고 금붕어처럼 아름답게 유영하는 모습을 구경했다

오후가 되어 동구밖 느티나무그늘이 너른 응달을 만들어 주고 매미가 울면

아이들은 산섶에서 긴 수염과 나뭇잎같은 날개를 가진 여치를 잡고

솜씨좋은 할아버지는 밀집으로 비틀린 피라미드처럼 엮어 여치집을 만들어 주셨다

할아버지가 없는 난 그 여름날 여치집을 가진 아이들이 무척 부러웠다

 

산그늘이 서늘하게 골짜기를 따라 내려오기 시작하면 나즈막한 산길을 올랐다

맑은 도랑물이 흐르는 산길을 따라 억새숲을 지나면 빨간 산딸기 덤불이 있고

습기찬 소나무 숲 아래엔 푸른 청기와 버섯과 하얀 진액이 나오는 젖버섯이 있고

응달진 산비탈 풀숲엔 노란 꾀꼬리 버섯이나 밀버섯이 소복하게 숨어 있어

저녁이면 유월 하지 감자와 부추를 넣고 풍로에 된장찌개를 끓여 먹었다

그 된장찌개에 넣은 산버섯은 어떤 고기보다도 쫄깃하고 향기로운 맛이였다

반딧불이 날아다니는 밤이 되면 후레쉬를 켜고 늙은 참나무 숲으로 가

늙은 옹이 구멍에 있는 사슴벌레를 잡아 코뿔소같은 뿔로 싸움질을 했는데

특히 밤나무 속에 살던 붉은색 사슴벌레는 검은 사슴벌레보다 힘이 셌다

 

 밤이 깊어도 더위에 잠못들면 큰 개울 다리 아래서 등목을 하거나

앞마당 평상 아래 모깃불을 지피고 누워 별자리를 보거나

삶은 햇감자와 옥수수를 먹으며 밤이 이슥하길 기다렸다

밤이슬이 내리면 둑방을 따라 달맞이꽃은 나비떼처럼 환하게 피어나고

산비탈 도라지밭엔 청보랏빛 도라지꽃이 함초롬히 이슬을 머금고 있었다

여름의 낭만은 그렇게 나무그늘의 낮잠처럼 달콤하고 별처럼 초롱초롱 빛났다

이렇게 반세기가 지난 여름날의 풍경은 깊은 추억의 호수에 수몰되어

가끔 그리움의 물살이 호숫가를 헤적일적마다 파문처럼 번져 나간다

이미 손상된 많은 기억들이 망각처럼 사라져 갔지만

옛날이 그리워 몽환처럼 꿈을 꾸는 한여름밤이면

아직도 유년의 아름다운 편린들은 유실되지 않고

내 안에서 오색 분꽃처럼 피고 진다

 

그러나 유년의 아픈 기억은 묻어둔 속울음처럼 토해내지 못하고

수장된 슬픔으로 깊은 심해속처럼 가라앉아 있다

그 또한 내 인생의 한 그림자이지만 나 혼자만의 역사이고 싶다

사라져간 많은 추억과 유실되어간 많은 편린들이 그리운 시절이다

아직도 마음의 꽃밭엔 누이가 심어 논 여름꽃들이 한창이다

봉숭아꽃물같은 아련한 기억들이다

달무리같은 그리움이다

 

 

 

2012년 7월 15일    먼    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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