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이틀 저녁이면 문상길에 올랐다. 다행히 요새는 출근해서도 일거리 없이 잠시 한가한 철이라 모처럼 여유있게 조문을 할 수 있었다. 그젠 나와 동갑내기가 벌써 하늘길로 떠났고, 어젠 아내 선배 어머님이 꿈결처럼 서운하게, 생전의 단아한 성품처럼 조용히 세상을 하직하셨다. 점점 이렇게 죽음길과 마주하는 게 예삿일처럼 가깝다. 나는 출근지가 서남쪽이라 늘 자유로를 거쳐 한강을 건너서 영등포가 기점이였는데 이틀동안 문상을 가는 덕에 광화문네거리가 기점이 되었다. 같은 서울인데도 어쩌다 서울 중심인 광화문에 오면 시골서 상경한 촌사람처럼 그곳이 낯설고 도심 네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이 윤택해보이고 멋스럽다. 내가 전철을 타고 다니는 구로공단지역을 오가는 사람들과, 서을 중심에 내리는 사람들과 또 멀리 강남네거리에 몰려드는 젊은이들의 삶이 별반 다르지 않을텐데, 어쩌다 그 지역에 내려 오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노라면 아직도 어떤 계급사회가 존재하는 듯 거리풍경이 낯설고 주눅드는 건 선입견일까?. 어쨋든 드믈게 광화문 네거리에 오면 멀리 변방으로 밀려나 있던 내가 다시 삶의 중심에 서 있는 것 같아 어느쪽으로 방향을 틀어야 할 지 감각이 없어 잠시 사방을 둘러본다. 그만큼 이 곳에 올적마다 서울의 모습은 달라져 있었다.
종로서적이 문을 닫은 팔구십년대 이후부터 지금까지 내 출발지의 중심엔 항상 교보문고가 있다. 가까운 서울로 상경 후 친구를 만나거나 도심을 혼자 배회할때는 늘 서점이 기점이 되다보니 자연 약속장소도 사라진 종로서적에서 교보문고로 그 위치가 바뀌었다. 만남의 장소로 책방보다 좋은 곳이 또 어디 있을까?. 누구든지 찾기 편하고, 조금 일찍 오고나 늦어지는 짜투리 시간에는 멍하니 조바심치며 기다릴일없이 책구경을 하거나 이것저것 서울의 공연소식이나 문화정보도 접할 수 있으니 더없이 편안하다. 그러다 서점안에 있는 문방구와 팬시점을 기웃거리기도 하고 지루하면 음반코너에 들러 이어폰을 끼고 새로운 맛보기 음반의 음악을 듣기도 하는 즐거움도 있지만, 그보단 책방안을 서성대며 책을 보는 사람들의 느린 여유가 더 보기 좋다. 그래서 난 예전에 종종 점심시간이면 큰 서점에 들러 짬짬이 신간서적을 구경하거나 음악을 골라듣는 혼자만의 행복에 빠져 있곤 했다. 그러다 직장을 옮겨 서울 중심에서 벗어나 변두리로 나오니 일상은 점점 시들어가고 뒤쳐지는 것만 같다. 그래선가 어쩌다 광화문 네거리에 나오면 마음이 들뜨고 으례히 붐비는 서점으로 향하게 된다.
그제는 일행과 같이 간 조문이 일찍 끝나는 바람에 모처럼 책방에 들러 그동안 책에 흥미를 놓아 피폐해진 내게 입맛 돋구는 어떤 맛깔스런 책이 있을까 하고 마치 처음 약초를 찾는 산꾼처럼 넓은 책방을 두리번거렸다. 작년인가 리모델링한 서점안은 예전엔 발디딜틈 없었는데 그 때보다 공간도 훨씬 넓고 쾌적해졌을 뿐 아니라 책을 보거나 검색할 수 있는 코너도 많아진것 같다. 그젠 블로그에서 접하고 알게 된 책과 저자를 미리 메모해 책을 찾아 보다가 문고판 두권과 시집 한권을 샀다. 손쉽게 인터넷으로 주문하면 편하겠지만 책방에서 직접 책을 고르며 원하는 책의 내용도 살피며 새로운 책을 구경하는 재미를 잊을 수가 없다. 가난했던 젊은날엔 문학에 대한 갈증을 손바닥크기만한 삼중당 문고판을 사 모으고 그 작은 책을 늘 남루한 야전잠바속에 넣고 다니며 읽던 추억으로 행복했는데 그날 찾고자 하는 책이 신기하게 작은 문고판으로 있어 무척 반가웠다. 문고판은 포장만 화려하고 알맹이가 허술한 요즘 책과 달리 여전히 거친 누런 갱지에 깨알같이 가득한 활자와 값싼 가격이 더 반가웠다. 어제 아침엔 전날 산 책 하나를 호주머니에 넣고 과자를 아껴먹듯 조금씩 책을 읽다가 졸리면 스르르 쪽잠도 자며 지루하지 않게 출근을 했다.
그날 오전 아내로부터 부음을 듣고 오후에 광화문에서 만나기로 약속을 했다. 아내는 약속시간이 두시간 정도 틈이 생겨 어쩌냐고 미안해했지만 난 그 시간동안 책방에 있어 행복했다. 저녁무렵 총총히 집으로 돌아가는 퇴근시간에 책방을 들르는 사람들의 여유가 아름답다. 시간이 멈춘듯 진열된 책들앞에서 책을 보거나 책을 찾는 사람들의 눈빛과 표정이 편안하고 선해 보인다. 나도 그 사람들속에 속해 있다보니 잠시 여유로워보이는 거 같아 그동안 정신없이 살던 일상에 위로가 되는 것 같았다. 누군가 내 옆에서 책을 보고 있으면 초면인데도 반갑고 어쩌다 내가 좋아하는 시인의 시집을 고르는 사람을 보면 차라도 나누고 싶은 충동마져 든다. 혹시 이 책방안에서 아는 사람을 만난다면 얼마나 반가울까 하는 실없는 우연을 꿈꾸기도 하다 법정스님의 선묵화 책을 보았다. 처음 대하는 스님의 필체는 날카로우면서도 바람처럼 부드럽고 자유롭다. 맑은 묵향의 글씨도 좋았지만 제자나 각별한 분들께 직접 붓으로 써서 보낸 편지를 보니 스님이 쓰신 한 글자 한 글자가 내 마음의 행간 가득 푸른 숲으로 들어차는 듯한 감동이 전해진다, 나도 이 담에 소박한 한지에 붓으로 그리운 마음을 적어 보내는 편지를 쓰고 싶다. 이 얼마나 여유로운 행복이냐!
그렇게 그윽한 묵향에 취해 걸음을 옮기니 작고하신 박완서작가의 책들이 가득 진열되어 있다. 소박한 촌부처럼 꾸밈없는 얼굴과 따스한 미소가 가을들꽃처럼 향기롭다. 무척 좋아하는 작가이면서도 나는 단편을 몇 번 읽었을 뿐 그 분의 책을 읽은게 별로 없다. 언제부턴가 단편집을 읽고부터는 소설책을 잘 읽지 않아서다. 펼쳐든 여행 산문집을 읽으며 봄이 오는 남도 기행을 따라간다. 물 흐르듯 막힘없고 가미없는 자연스런 문체가 정많고 소박한 시골버스를 타고 여행하는 느낌에 빠지게 한다. 오래 서 있자니 다리도 아플텐데 그동안 내가 좋아하는 노래와 음악을 내려받은 MP3의 이어폰을 끼고 음악에 맞춰 까딱거리며 발장단을 치며 책을 보니 활자가 침침하긴해도 시간가는 줄 모르고 즐겁고 행복하다. 헤아릴 수 없이 가득 진열된 책속에 있다는 건 마치 싱그런 오월 숲에 들어와 있는 듯 마음이 청정해지고 푸르러진다. 마음속으로 이 다음 조금 더 나이들어 책과 음악이 있는 서재가 있어 이런 여유를 누릴 수 있다면 좋겠다는 소망을 뒤로하며 인문학코너를 서성이니 한길사의 두꺼운책들이 20% 할인되어 좌판대에 있다. 그 중 노자번역서가 눈에 띤다. 책에 욕심을 놓은지 꽤 되었는데 주저없이 책을 사 들고 서점을 나선다. 그럴 때는 마치 세상을 다 얻은 것처럼 부자같다면 너무 과장된 표현일까?. 과장되어도 나는 언제나 책방에 가면 행복해진다.
2011년 2월 10일 먼 숲
■ 어제 법정스님의 선묵화를 보다가 메모한 글귀를 적어 본다
다섯이랑 대를 심고 / 다섯이랑 채소를 갈고 한나절은 좌선하고 / 한나절은 글을 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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