쓸쓸함을 듣다

십일월 숲길의 抒情

먼 숲 2010. 11. 13. 1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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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너해의 가을을 후루루 낙엽지듯 바삐 지나치다보니 단풍시절을 놓치거나

낙엽진 가을숲에 들어서고 싶다는 소소한 여유마져 생각도 못하고 세월을 보냈다

그 사이 내 생의 가을도 깊어 스산한 십일월에 당도하다보니

삶에 지쳐가는 무거운 어깨가 시리고 가슴이 답답하니 먹먹해져서

벗어날 수 없는 삶의 굴레에서 잠시나마 자유로운 일탈을 꿈꾸고 있었다

어느듯 자신의 이름을 버리고 가족과 사회의 구성원으로 코를 꿰고 살아가는 일상이

때때로 우울해지거나 가끔 내게 짐지워진 모든 게 버거워 벗어버리고 싶단 생각을 하는 지금을

소심해지고 시들어가는 갱년기 현상이라 해야하나, 작은 일에도 서운함이 많이 생긴다

오랫동안 바쁜 날들을 보내다 요즘 갑자기 찾아든 계획할 수 없는 여유로운 틈새 시간을 만나니

막상 어찌 보내야 할 지 갑자기 조퇴한 날처럼 막연해지고 허전해지는 요즘

일터에서 가까운 서울 근교로 야유회를 나갔더니 계곡은 깊어진 추색이 무르녹아 있었다

축구시합을 하는 젊음들을 뒤로하고 홀로 낙엽지는 길을 걷다가 뜬금없이 적조했던 지인에게 전화를 걸어

어디 한적한 만추의 숲길로 떠나지 않겠냐며 엉뚱하게 나는 가을여행을 부추키고 말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간을 내어 흔쾌히 여행을 계획하고 동행해주겠다는 지인의 넉넉한 마음에

스러지는 아름다운 십일월의 숲길을 찾아 바람같은 여행은 시작되었다

 

 

 

 

 

 

 

 

짙은 안개속에서 느린 기지개를 펴는 십일월의 회색빛 아침

그저 얼마전 지나쳤던 자작나무를 다시 조우하고 싶다는 지인의 뜻에 따라 가을바람처럼 떠난다

길을 가다 마음 내키는대로 어느 산골짜기로 저무는 늦은 가을빛을 만나자며 목적지 없이 떠나는 길

단조로운 전시관 같은 덕평휴계실에서 잠시 숨을 고른 후 길은 영동고속도로 옛길로 접어든다

새 길에 밀려 시골길처럼 한적하고 쓸쓸해진 고속도로의 옛길로 드니 마지막 만추의 풍경이 고즈넉하다

여행은 낯설음과 친해지는 수줍은 인사와 대화인지도 모른다

약속을 하고 계획을 짜고 시간을 맞추어 떠나는 정해진 일정보다 바람처럼 뜬금없이 떠나는 자유로움이

예기치 않던 풍경과 사람들을 만나고 그런 자유스런 시간속에서 낯설음은 신선해지고 인상에 남게 된다

각본없이 즉흥적으로 떠나는 구름같은 여행이 진정한 여행의 멋과 느낌일 것이다

둔내를 지나 호젓한 국도로 접어든 십일월의 가을풍경은 적막하고 쓸쓸하다

서리맞은 고추밭과 이미 빈 고랑을 드러 낸 배추밭은 가을을 마감한 채 허허롭다

드문드문 나타나는 산밭엔 빈 수숫대나 옥수수대 사이로 부는 스산한 바람이 가득하리라

조락의 아름다움이 십일월의 화폭에 쓸쓸한 여백을 남기면서 갈빛 수묵화를 그린다

차창에 비쳐드는 눈부시지 않은 오전의 햇살속에 드러나는 산빛은 아직 황색의 따사로움으로 빛난다

횡성을 들어서 청태산 줄기를 오르는 길가에서 뜻하지 않게 꽃덩굴보다 아름다운 노박덩굴을 만났다

시골살이에서 눈 온 초겨울에 어쩌다 본 주황빛껍질 가운데 빨간 열매가 꽃처럼 아름답던 노박덩굴

좀체로 만나기 쉽지않은 열매을 보기 위해 차를 멈추었는데 칭칭 감아올린 꽃덩굴이 이곳엔 지천이다

 

 

 

 

 

 

 

 

 

우리가 미끈하고 고귀한 자태와 그윽한 품위를 지닌 자작나무숲을 만난 건 그 언덕에서다

청태산 휴양림 입구를 지나 막 고개을 넘으려던 찰나 숲체원이란 이정표를 비껴서서

눈부신 흰색의 턱시도에 검정 나비타이를 한 수려한 외모의 자작공을 본 것이다

반가운 인연은 그렇게 우연처럼 만나는 것, 설레는 마음으로 그를 만나기 위해 가벼운 행장을 꾸린다

머나먼 시베리아 벌판이나 영화 닥터 지바고에 나온 바리끼노의 겨울풍경속에서나 보던 자작공을

저무는 가을길에서 이리 쉽게 만나다니 오늘의 여행길은 먼 이국에서 길을 떠나는 보헤미안처럼 자유롭다

계곡 아래서 시작된 자작숲으로 드는 길은 산림청에서 조림한 인공림에서 시작되고 능선을 양분하여

좌청용 우백호라고 왼쪽엔 잣나무나 전나무 같은 침엽수와 낙엽송이 계곡을 따라 푸른 위용을 자랑하고

오른쪽은 희고 미끈한 이국적인 자작나무들이 파아란 하늘을 지붕삼아 흰 옷을 입고 성스럽게 도열해 있다

마치 성벽을 사이에 두고 숲속에서 나무들이 좌측은 진시황제의 병마용처럼 늠름하게 서 있고

우측엔 영국 왕실을 지키는 멋진 근위병들이 기품있게 사열식을 하듯 줄지어 서 있다

그래선가 산골짜기는 뽀얗게 숲의 정기가 서리고 나뭇사이로 드는 빛에 드러난 박무가 신비로웠다

그렇게 사잇길 좌우로 맑은 가을 햇살이 우리를 에스코트 하고 갈빛 비단 융단이 깔린 길가엔

수많은 동서양의 근위병들이 도열해 한가로이 산을 오르는 우릴 귀빈처럼 영접하고 있다

아무도 없는 호젓한 산길을 귀족처럼 여유롭게 느린 걸음으로 가을을 만끽하며 발걸음을 옮긴다

그 날은 계곡으로 부는 바람도 없어 스산하게 낙엽지는 소리도 들리지 않고

오직 사각거리며 낙엽을 밟는 내 발자욱 소리만 적막한 산길을 따라온다

 

 

 

 

 

 

 

 

 

 

 

완만한 경사의 능선길은 폭신한 낙엽이 쌓인 오솔길이 되어 앙상해진 산맥의 등허리로 인도한다

간간히 길옆엔 푸른 엽록소가 모두 탈색된 들꽃과 풀들이 투명한 갈빛의 잎맥과 뼈대를 드러낸다

영혼이 모두 사라진 마른 꽃들이 안스러워 가던 걸음을 멈추고 스러지는 가을을 향해 인사를 한다

산 중턱을 넘어 8부능선길에 드니 푸르른 조릿대가 너른 잔디밭처럼 길게 깔려 있다

눈이 오는 겨울, 푸른 조릿대 숲의 풍경을 다시 보고싶다면서 

그 곳에 앉아 가벼운 요기를 하고 쌉쌀한 커피를 나눠 마신다

숲은 온통 부드러운 갈빛으로 물들어 낙엽향기가 그윽하고 포근한 가을 햇살은 누에걸음으로 산을 오른다

모두 커피를 마시며 숲속에 비쳐드는 카키와 브라운 톤의 부드러운 무채색의 가을빛에 반응해

지금 저무는 저 아름다운 가을 숲속의 빛을 가까운 지인이 명명한 모카 브라운빛으로 통일한다

쉴사이 없이 이 모든 풍경을 카메라에 담는 지인은 박무가 부드러운 갈색의 저 숲을

"거품이 풍성한 커피같은 숲"이라며 자작의 숲과 낙엽송의 황금빛에 찬사를 보내며 가을향기에 취한다

정오를 지난 빛의 흐름은 더욱 낮은 각도로 숲의 틈서리를 비추고 잔영으로 남은 산그림자는 고적해진다

낙엽송 사이사이 키 작은 조릿대의 숲에 내린 빛의 조도는 깃털처럼 부드럽고 투명하여

푸른 잎새 하나하나가 이 숲속을 이야기 하는 활자처럼 살아나 푸른 사색을 읽어나간다

키를 낮춘 빛의 잔광들이 산그림자가 되어 산속 골짜기를 되짚어 갈 적마다

골짜기의 낙엽송이 빛을 발하며  켜켜히 쌓인 황금빛 노다지 금맥처럼 눈이 부시다

로키산맥의 가을이 부럽지 않은 황홀한 추색의 장관이 산맥을 따라 길게 누워있다

 

 

 

 

 

 

 

 

관조한다는 것, 그 느린 시선과 생각은 얼마나 여유롭고 편안한가

숲은 그러한 느림과 사색을 품어주는 포용의 품안이다

언제나 밀어내는 일 없이 깊은 가슴을 보여주고 넓은 어깨를 내어주며 기대게 한다

오르막과 내리막의 가파른 길에서는 내쳐가는 일 없이 잠시 심호흡을 하며 쉬어가게 하고

산 아래 내가 사는 세상과 내가 살아 온 길을 내려다 보며 천천히 돌아보게 한다

그렇게 산 위에서 내려다 보는 느린 관조는 높은곳만 바라보던 부질없는 욕심에서 깨어나

모두가 산 아래 사는 속세의 미물이란 생각을 일깨워 평안한 마음과 여유로움을 느끼게 한다

어쩌면 사람의 한 생은 이 숲에 사는 나무보다도 유한한 자연의 일부분이라며 

마음을 치유한다는 건 거스르는 것을 버리고 자연에 순응하고 마음을 여는 데 있다고

가난한 십일월의 숲은 텅 빈 가슴을 보여주며 우리에게 향기로운 지혜를 전한다

돌아보니 사연도 많은 굽이굽이길일 것 같은 같은 내 삶의 길이 참으로 짧고 보잘 것 없다

늘 길을 잘못 들어선 것 같은 후회를 내세워 굴곡진 삶을 위로하려했지만 그게 주어진 내 모습일게다

이미 내가 살아온 길들은 가지않는 길을 남겨두는 선택의 여지도 없이 가야했던 운명은 아니였는지

그 많은 방황의 날들이 스쳐가는 태풍같아 덧없는 세월의 아픈 흔적에도 연민의 정이 간다

낙엽으로 수북히 쌓여가는 숲속에 나도 한 해의 무거운 옷과 시름들을 벗어 놓는다

허물을 벗고 다시 새 옷을 입는 거듭나기의 숲속에서 나도 오늘은 알몸으로 서고 싶다

춥고 고독한 동면이 끝나고 봄이 오는 계절이 오면 다시 이 숲에서 푸른 생을 느껴 보고싶다

그리고 귀밑머리 하얀 벗들과 어울려 수런거리는 수목의 이야길 들으며 꽃피는 숲길을 걸어 보리라

 

 

 

 

2010년 11월 15일    먼    숲

 

 

 

■  남김없이 옷을 벗는 십일월, 공연히 감상을 벗지 못한 진부한 글을 올리며 이 여행을 동행해 주시고

    제 글의 모든 사진을 제공해 주신 우두망찰님께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 에 ■ 필 ■ 로 ■ 그

 

 

 

빛을 놓치고

세월을 놓치고

청청하던 숲을 놓치고

 

기우는 십일월

뷰파인더에 놓친 숲을 담는

만추의 중년

 

찰칵 찰칵

사라지는 가을을 포획한 순간들

이르게 내려오는

산그림자가 지우는데

 

빛이 이울적마다

보여지는 생의 뼈대들

이제 비로소 쓰다듬고 싶은

나무들의 체온 

 

숲의 가난한 전언을 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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