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 숲에서 오솔길까지

낙엽 따라 떠난 가을 편지

먼 숲 2007. 1. 26. 14:08
 
 

 

  

 

 

 

쇠잔해지는 저녁 햇살이 깊은 산그림자를 드리우는구나.

 

 


가을의 길목에 선 햇살의 느낌은 바람에 일렁이는 능선의 억새 꽃처럼 부드러울 것 같다. 바라다 뵈는 먼 산은 아직 여름산처럼 푸른데 아파트단지 주변의 정원수들은 조금씩 단풍빛을 띄고 물들고 있더구나.  하지만 올 가을은 고운 단풍을 보기 쉽지 않을듯 하다. 햇빛이 많아야 빛 고운 단풍이 들 텐데 여름이 가도 유난히 비가 많아 빛 고운 단풍이 될 것 같지 않구나.

 

오색의 화려한 단풍 축제는 이번 가을비에 떨어지고 갑자기 추워져 무서리가 내린 채 쓸쓸한 십일월이 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나는 가을이 무르익는 주말마다 밭에 나가 들깨도 베고 알이 주렁주렁한 땅콩도 캐면서 모처럼 구수하고도 달큼한 가을의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얼마 전엔 송추쪽 예비군부대 훈련장에 갔다가 바람에 떨어진 알밤을 한말이 넘게 주우면서 억새풀 속에서 가을의 구절초 향기와 풀꽃향기도 마음껏 즐길 수 있었다. 

 

알게 모르게 가까이서 느끼는 산 속엔 벌써 풍성한 가을의 모습으로 옷을 갈아 입고 있었다. 이젠 내가 느낄 수 있었던 풍성한 계절의 감각도 둔해지고 나태한일상은 계절 자체를 무시하며 TV나 액자 속의 그림 보듯 스쳐 지나가고 있다. 시월이 되면 가을을 마음에 담고 너를 만나고 싶다 하면서도 제대로 짬 한번 내는 성의 없이 바쁘다는 핑계로 시간을 채운다. 아픈 네가 무척 벗들이 보고 싶어 할 터인데 하면서도 말이다. 어쩌면 너는 하루하루 다가오는 가을이 아쉬워서 시간이 두렵고 서러워 할지도 모를 터인데 미안하구나.

 

 

너는 마치 마지막 잎새가 되어 생명의 끝은 얼마나 허망할까 하면서 창을 향해 하늘을 보는 시선이 무척이나 허허로울지도 모른다 짐작하면서도 나는 네게 나눠 줄 힘과 기쁨이 어떤 것인지도 모르고 그나마 위로 할 아무것도 없어 안타깝기만 하다. 그저 마음은 편지 가득 가을 들꽃 향기와 바라보는 빛 고운 단풍을 담아 보내고 싶다. 막상 누워 있는 너를 생각하니 푸르고 건강했던 날 추수가 끝난 빈 벌판 같은 십일월이 오면 인사동 찻집에서 솔잎차라도 마시면서 어설픈 인생얘기라도 나누었던 추억이라도 있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앞선다.

 

제복을 벗은 후 각자의 목표와  희망을 찾아 멀리 떠나기도 하고 헤어져 바쁜 날을 보내고 나니 어느새 세월만 흘러 썰물진 강가에 와 있구나. 푸르른 날 어지간히 어긋난 일에 대하여 흥분한 채 열변을 토하던 너도 이젠 녹녹하니 수그러져 가을을 맞고 노을 지는 추억의 옛길을 얘기하는 중년이 되었으니 마음 한구석엔 이제는 국화 향기라도 그윽할 것 같다. 그리고 우린 아직 늙었다 말 할 수 없지만 편안하고 둥글어졌지 않았을까.  신문을 펼치다 보니 지금 우리가 공감할 수 있는 시구가 있어 적어 본다


살아갈수록 길은 낯설다.
뒤돌아보면 추억은 굽이진 몸을 숨기고 있다.
걸을 때마다 앞길은 자주 끊어져 있었고
끊어진 길을 잇다가 보면 뒷길도 끊어져 있었다.
문득 길의 끝이 바다에 묻힐 때
먼 수평선에 닿을 수 없는 길이 보였고
닿을 수 없는 길이 산에 밟혀 있을 때
깜깜한 동굴에 몸을 감추는 길의 옷깃이 보였다.

 

- 김문희 의 (낯선 길) -

 

 


지금 우리를 되돌아 보니 살아 간 인생이란 길의 의미가 이 시와 같지 않을까 생각되어 자꾸 되뇌고 있노라면 꿈속만 같던 길들이 그림처럼 우리의 상념 속에 확연하게 그려지는 것 같다. 항상 끊어질 듯 이어지던 인생의 오솔길이  보인다. 이 가을 낙엽지는 가을 산길을 걸어 우리의 옛 동산엘 오르고 싶다. 오솔길은 혼자만의 대화와 고요한 사색이 있고 쓸쓸한 발자취와 넉넉한 여유가 있었다.

 

낮달이 혼자 지는 나즈막한 변두리의  길가엔 눈 맞추던 들꽃이 있거나 내리막길 옆 양지쪽엔 조용한 묘지도 다정히 있었지. 길이 끝나는 외진 곳엔 늙은 소나무 두 그루가 세월을 지키고 있고, 그 옆엔 큰 바위가 있어 한참씩 앉아 생각의 꼬리를 늘리기도 했던 오솔길이다. 가끔 가슴 아픈 노래를 혼자 부르다 울기도 했던  한적하고 굽은 길이 내 아름다운 시절의 산책로였다. 사는 것은 안타깝게도 길이 보이지 않지만 작은 행복을 느낄 수 있는 오솔길이라도 있으면 좋겠는데 바라보면 생각의 끝은 먼 수평선이고 길은 끊겨져 있구나.

 

이 가을 혼자 사라진 나의 옛 오솔길을 마음으로만 걸어 본다. 결국 모든 것은 변하고 잊혀저서 남는 것은 마음에 쌓인 추억뿐, 그것마져도 사라지고 나면 나란 존재도 바람일 터인데 세상의 모든 것에 애착과 사랑과 미움으로 매달려 수심으로 여윈 나뭇잎처럼 흔들리며 사는구나. 아침마다 지나치다 빛 고운 단풍을 보며 내 생의 끝자락도 저렇게 고운 단풍이고 싶다 생각한다. 생의 마지막 순간에서 황홀하고 고운 빛으로 물들어 타오르다가 바람과 같이 미련 없이 떠나는 단풍이 무척 아름답게 보여서다.

 

 

어쩌면 너도 그런 생각을 하며 누워 있는지 모르지만 이렇게 빈 마음으로 있을 땐 나 역시 낙엽이다. 그러나 나 또한 그런 맑고 빈 마음으로만 살 수 있는 처지가 아닌 때 묻고 고민하고 사랑하고 미워하고 욕심 가득한 사람이다. 때로는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많은 것을 주지 못해 마음 아프고 거짓과 이기심에 너무나 태연하게 병들어 간 내가 미워 도망가고 싶다. 때때로 내게 주어진 많은 책임의 멍에마저 벗어버리고 포기하고 싶은 나약한 인간임을 보고 그러한 내가 초라해서 가여워진다.

 

하루종일 그 모든 무거운 번민을 힘없는 가슴에 안고 힘겨워 하는 네 곁에 빛깔 고운 낙엽이 수북이 쌓여 가을의 향기 속에 취해 있게 하고 싶다. 이 에머랄드빛 가을. 우리 맑고 푸르른 하늘과 바람으로 얼굴과 마음을 씻고 겸허하고 가난한  마음으로 들국화 향기 가득한 들녘에 나서 보자. 억새 꽃이 하얗게 출렁이는 언덕에 서서 추억의 뒤안길을 돌아보면서 결코 살아온 것을 후회하지 말자. 누가 살아 줄 수 없는 내 인생, 소중하게 생각하자.

 

어느 시인이 누가 저렇게 고운 새의 깃털을 저리도 많이 아름답게 이 땅에 심어 놓았냐고 감탄했다던 억새 꽃이 오늘도 너의 아픈 모든 상처를 가볍고 부드럽게 위로해줄 것이다. 마음으로나마 시골의 이름없는 마을로 떠나자. 예전엔 가을이 되면 메마른 숲 속에 파묻혀 오랫동안 드볼작의 현악사중주나 막스 브르흐의 콜니드라이라는 첼로의 애절한 선율과 깊은 울림만 들어도 아름다운 눈물을 흘렸었는데 그 촉촉했던 감정의 호수가 이젠 꿈결같구나. 퇴색해가는 가을 숲 속에서 혼자 외로워지면 고독하게 핀 보랏빛 용담 꽃을 찾아 서성이던 열 아홉 시절을 회상하니 새삼 멀어진 세월이 그립기만 하다.

  

 

가는 시간이 아쉽고 다가올 시간이 두렵겠지만 스스로와의 싸움에서 괴로워 하지 말고 순리대로 받아 드리고 순종하는 깊고 조용한 기도로 마음 다스리자. 짧다면 짧은 시간이지만 그 찰라의 인간 세상에서 느끼고 살아 갈 수 있었다는 사실로도 우리의 소박한 역사는 남는다. 편안해진 마음으로 홀로 있는 고독감을 이겨 내고 긴 겨울을 지나 또 다른 봄을 맞이하자. 네가 사랑하는 모든 것이 널 아프고 슬프게 하겠지만 사랑할 수 있다는 대상들이 있다는 것은 고마움이다.


내가 자란 시절이 지나면 그 비워진 의자에 또 다른 세대가 대신하는 것이 삶의 순리인가 보다. 지금사 내 아이들이 자라면서 비워진 자리에 작은 행복을 채워주고 있기에 그 애들이 내겐 보물임을 안다. 살 수록 나를 사랑하고 의지해 사는 아내한테도 여러모로 풍족하게 해주지 못해 늘 죄인 같고 미안하지. 그리고 날 사랑해 준 어머님이 마른 나뭇가지처럼 쇠잔해 지는 것도 이 가을 마음 아프다.

 

그래 사랑하는 사람들이 많다면 행복하면서도 그들에게 내가 줄 것이 없는 가난한 처지라는 것이 마음 아파 슬프다. 나도 그렇게 살고 있고 너도 그렇겠지. 아마 몸이 아파 누워 천정만 바라보고 있는 네 마음은 오죽할까 생각하니 더욱 가슴이 답답하지만 지순한 마음으로 이 가을의 햇살 아래 기도하면서 살자. 작은 소망이 이루어져 감사할 수 있는 행복을 주십사 하고 곧 사라질 가을을 아름답게 살자. 낙엽이 붉어지면 내 마음도 붉어지고 가을의 계곡도 붉어져 깊어 가겠지.

 

1999. 10. 15일. 먼     숲 (오래된 편지 중에서)

  

 

 

                                      <사진: 네이버 포토 "지나가는 이" 갤러리에서>

 

 

■ 그가 떠난 뒤의 가을

 

서쪽은 아직 석양이 따스한 모닥불처럼 그 불씨가 잦아드는데 거리의 가로등은 점등을 서두르는 저녁입니다. 가고 나면 그 빈자리로 또 다른 이야기와 삶이 새로운 발돋음으로 일어서며 과거사는 잊혀져 갑니다. 그렇게 시간의 잎을 떨구며 서둘러 돌아가지만 내일 떠 오르는 태양은 사라짐을 망각이라는 차가운 말로 종지부를 찢지 않고 날마다 새롭게 빛나고 나를 향해 있습니다. 이 가을의 중심에서 다소 우울했던 마음 주체하지 못하고 아침 단풍처럼 울컥 붉어졌지만 해가 지면서 가라앉고 제자리 합니다. 정체될 수 없는 자리를 살면서 이별도 가끔은 익숙하게 받아들여야하나 봅니다. 이미 떠난 사람도 나름대로 흙이 되어가며 고향을 이루고 있겠지요.


이런 연습을 거듭하며 담담해지는 세월을 느낍니다. 잠시 머무르기엔 너무나 소중한 시간들. 생각해보니 너무나 할 일이 많은데 너무 뒤돌아보며 기울게 서 있지 않나하고 하늘을 봅니다. 사랑해야 할 사람들!. 보살펴야 할 사람들!. 그 모든 주어진 내 삶을 영위하기 위해 다시 마음의 등불을 켜고 자릴 일어섭니다. 책상 가득히 쌓인 가을 낙엽들을 세월의 서랍에 밀어 넣으며 마음 가득 밀려오는 가을의 느낌들을 호주머니에 담아 보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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