밭머리에 앉으니 밭둑에서 풍겨오는 풀냄새가 싱그럽다
제일 먼저 햇쑥 향기가 그동안 먼지 낀 코속을 박하향처럼 자극한다
알러지에 민감한 코라 환절기마다 이비인후과를 드나들어도
이 자연의 순하고 순수한 냄새엔 유순하고 민감한 반응을 한다
엊그제 밤 새 내린 비맛을 본 파밭엔
청록색의 짙은 파잎이 기세좋게 뾰족한 발돋음을 한다
사월의 파밭은 멀리서 보기만 해도 코가 매울정도로
하얀 파꽃을 피우기 위해
독이 오른 모습처럼 성장속도가 빠른 것 같다
밭머리엔 언제 심어 놓으셨는지
봄마늘이 한 뼘을 자라 새 순을 피운 묘목처럼 싱싱하다
노모는 가을겆이가 끝난 늦가을에도
먼 길을 오가며 여기저기 축축한 터에
밤톨같은 마늘을 심어 놓으셨나 보다
어머닌 추운 겨울을 지나면 어김없이 싹을 띄울 생명의 이치를
가장 훌륭한 삶의 철학으로 알고 계시는 꼬부랑할머니 농군이시다
세상의 순리와 이론은 그 농사의 정직성에 두고 계시며
확고한 종교이고 진리라 여기신다
뿌리면 거두고 사랑하면 열매 맺는 평범한 진리를
일년내내 땅과 곡식과 어울려 사시면서 인생의 좌우명으로 사셨다
마늘밭이 추울까봐 겨울내 허접쓰레기 같은 것으로 덮어 놓으셨고
이제 마늘은 봄약속처럼 푸른 싹으로 주인에게 인사하고 있는 것이다
어머닌 요즘 무척 바쁘시다
때를 놓치지 않아야 하는 파종기다
신도시와 함께 농사를 버리고 떠난 옛 이웃의 버려진 땅을 일구고
몇 년 째 당신이 논을 밭으로 형질변경까지 하시며
해마다 온갖 채소와 잡곡을 다 경작하셨다
그 바람에 난 휴일마다 편안히 쉬질 못하고
서툰 삽질과 김매기에 녹초가 되기도 한다
이십년을 넘게 농사를 해 봤어도 나이 들어 가끔씩 하는 노동은
일요일 하루 일하고 일주일 내내 천근만근되는 피로와 싸우게 한다
그래도 흙냄새와 푸른 푸성귀의 향기를 대할 적마다
젖내나는 고향처럼 편안해진다
사월들어 한 해 동안 잠잤던 땅을 파고 밭고랑을 만든다
어머닌 이 고랑엔 옥수수를 심을까
그리고 저 고랑은 조와 수수를 심으실까 생각할 적 마다
내 마음의 이랑도 그리 다양하고 풍성하게 경작하면 좋겠다는
작은 바램을 담아 삽으로 파고 흙을 고른다
뻐근해지는 허릴 펴가며 땅를 팔 적마다
지렁이, 굼뱅이가 놀라 긴 기지개를 펴고 꿈틀댄다
윗 논에서 내려온 물고랑엔 복새가 쌓여 편편하게 메꿔져 있다
한해동안 빗물에 씻겨 쌓인 퇴적층이 작은 삼각주를 만들었다
모래가 대부분인 복토를 쳐 올려 물고랑을 내며
살면서 내 마음에 쌓인 무거운 퇴적층도 시원하게 쳐올려서
막혔던 삶의 순환로를 뚫어버릴 순 없을까 하는 생각이 앞선다
새로 퍼 엎은 흙의 질감에서 생동감을 느낀다
대지의 촉촉함과 구수한 흙냄새가
게으름의 포만으로 더부룩한 위장을 편하게 하는 느낌이다
포실포실한 흙덩어리를 툭툭 쳐대며 평평한 밭고랑을 고른다
이제 여기저기 열두가지 씨앗을 심으면 한여름
고랑이 보이지 않게 그 푸른 성장을 보여줄 것이다
여름내내 싱싱하고 푸른 푸성귀를 먹고
나는 마음이 다소 초록색이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어느새 흰머리가 듬성듬성한 나는 마음으라도 푸르고 싶다
퇴색해가는 마음의 비곗살이 초록의 엽록소로 물들어
다시 무성해지는 사념의 숲이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밭뚝에 벌써 돋나물이 가지를 치며 새초롬한 잎을 키우고 있다
소복하게 돋은 돋나물이 곧 별같은 꽃을 총총 피울 것이다
사월의 밭머리에 앉아 바라보는 풍경은 지상낙원이 따로 없다
훈풍이 불어가는 동산엔 진달래꽃이 붉다
건너편 비닐하우스 앞엔 목련이 여기저기 눈부시게 환하고
기찻길을 따라 만개한 노오란 개나리가
이 봄 더없이 아름다운 천국의 울타리를 만든다
2001.4.16일. 먼 숲
■ 옛 글 "추억의 오솔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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