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히말라야에 가서 히말라야가 어디냐고 물었다 사람도 산山도 고개를 젖는다 히말라야에선 아무에게나 주소를 물어서는 안 된다 히말라야는 땅에 주소를 둔 게 아니라 하늘에 주소를 두고 있다는 것을 나그네들은 모르기 때문이다
히말라야에선 신神이나 바람에게 길을 물어야한다
히말라야에는 본류本流로 드는 물의 정거장과 눈雪과 바람의 정거장이 있어 매표구엔 어린 신神들이 히말라야로 가는 표를 팔고 있다 지정된 좌석이 없으니 차표를 미리 구할 필요는 없다 과한 짐은 사절이지만 세상 돈으로 차비를 요구하는 법도 결코 없어 풀꽃이나 경전 한 구절이면 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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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말라야, 가서보면 안다 우리들의 삶, 저 까마득한 하늘 가까이 돌 절벽에 화전 일구는 일일지라도 저잣거리의 욕심은 모두 헛것이고 누구에게나 태초의 시간은 그곳에서 시작된다는 것을, 손목에 매달린 시간을 끝내 놓치지 않겠다던 사람도 히말라야에 들면 세상의 속도는 온데간데없고 왜 주소가 필요 없는지 알게 될 것이다
인생의 막장을 지날 필요도 없이 히말라야에 가면 단 한가지 뜻밖의 선물에 놀라게 되는데 누구에게나 땅의 주소가 아닌 하늘의 주소를 예약 받게 된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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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깊이 녹슬기 전에 수혈을 받으리라는 생각뿐이었다 시간 앞에 녹슬지 않은 것은 없으니, 그러나 히말라야는 예외다
신神들의 영토 히말라야에 가면 수천 개의 봉우리에 깃들어 사는 신神들을 만나지 못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무욕無慾의 땅 히말라야에선 상처가 깊을 수록 눈부신 새 살을 경험하게 된다 소리는 허공에서 펄럭이고 펄럭이는 깃발 속으로 느리게 걸어가는 사람들 걸어서 만난 오늘은 수없이 경험한 어제와는 다르다 내일 다시 히말라야를 걸을 수 있다면 그것 또한 오늘과는 분명히 다를 것이다
가보지 못한 길이라고 언제까지 상상만 할 수는 없었다 섣부른 상상에 지쳤고 더는 기다릴 수 없어 나는 갔다 왜냐고 묻지 말라 신을 만나기 위해서도, 산에 오르기 위해서도 아닌 오직 걷기 위해 갔을 뿐이다 히말라야, 걸어서 오르려면 신들의 허락 없이는 어림없는 일이다 갈길 너무 멀고 아득해 걷는 동안 내 몸이 만든 경전에 모두를 바치고 싶을 때도 있었다 얼마나 많은 순간들이 길 위에 바쳐졌는지, 얼마나 처절한 방황이 내 안에서 나를 다독였는지, 때로 부질없는 꿈과 헛된 발길질로 현실을 상상처럼 안고 갈 때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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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을 향해 오른다는 것은 보다 깊은 곳의 뿌리를 더듬는 일이어서 그것은 뼛속까지 사무쳐 끝내는 죽음 이전의 본류로 드는 일이었다 바람 외에는 누구도 가는 곳 어디냐고 묻지 않았으므로 때로 나는 내가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 채 그곳까지 흘러들었다 나는 나로부터 떠나왔고 세 들어 살던 세상으로부터 아니 세속의 모든 것으로부터 도망쳤음을 히말라야에게 자백하지 않을 수 없었다
희망과 절망이 공존하는 곳 히말라야에선 외롭다는 말은 존재하지 않는다 사랑 따위에 목숨을 거는 어리석은 사람도 없다 모두들 설산에 기대 사는 자연이기 때문이다 걷는다는 특별한 축복도 어디까지나 자의적인 선택일 뿐이어서 서서히 나에게서 내가 빠져나가는 행위 이전의 어떤 교감으로부터도 온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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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 속처럼 달밤의 산 속에는 그만의 고요가 있다 소리와 빛을 뛰어넘는 진공의 초극이 그러할까 삶도 죽음도 잠시 비낀 그곳은 지금까지 내가 알고 있던 태초의 시간과 닮아 있었다 모든 생명 가진 것들은 새롭게 태어나고 산의 정거장마다 탱탱하게 부푼 고요가 정점을 이루니 명상이라는 화두 없이도 모든 것은 명상이다 절뚝거리는 고통이 없다면 내 다리 역시 내 것은 아니다 몸도 마음도 처음엔 내 것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 나는 여기서 '나' 라는 존재 앞에 비로소 익명을 버리고 본류本流에 보다 가까이 다가가고 있었던 것일까
밤마다 달빛에 이끌려 밖으로 나갔다 그렇게 만나고 싶었던 전설의 설인雪人 예티는 어디에도 없고 죽음 같은 설산의 고요만이 바다를 이룬다 추위에 떠밀려 방으로 돌아온 나는 그 한 밤 무슨 맘으로 배낭을 열어 거울을 꺼냈을까 거울 속에는 머리를 산발한 히말라야 거지가 웃고 있었다 예티인가? 머리에 흰 수건 쓴 말없이 웃고 있는 그녀
저 건너 산 중턱에는 그때까지 잠들지 못한 야크들이 설산을 배경으로 느리게 걷고 있었다 황량한 고산의 추위를 그대로 안고 사는 야크들 그들이 감당해야하는 짐의 무게나 천형의 높이란 차라리 하늘이다
<시 와 사진 : 김인자님의 "하늘에 주소를 둔 사람들"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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