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벌써 입춘이 지났으니 지리산 골짜기의 고로쇠 나무들은 하얀 링거주머닐 허리에 차고 웅담을 채취하는 곰처럼 말간 수액을 눈물처럼 흘리고 있을 것 같다. 해동의 기미가 스멀거려선지 어둠의 각질이 푸른 살비듬처럼 떨구는 새벽이면 불면의 정수리 근처에선 자주 졸졸거리는 물소리가 들려오고 날개쭉지 아래가 가렵다. 마른 수피에 물이 오르니 내 안의 물관부도 뿌리 아래부터 관통하는 용트림이라도 시작되어야 될 시기인데 왜그런지 겨울가뭄이 끝나지 않은 마음은 이월의 건천이다. 이젠 내 몸도 해가 갈수록 새싹이 움트기 전 자신의 골수를 藥水로 보시하는 고로쇠(骨理水)나무가 아니라 외롭고 늙고 쇠잔해져 가는 고로쇠(孤老衰)나무가 되는 것 같아 쓸쓸해진다.
그러나 비록 초록의 기운은 기울어갔지만 삶의 밑동은 실해진 나이다. 하여 청청한 고로쇠 수액은 못되어도 쓰고 떫더라도 뽀얗게 우러나는 인생의 진국이 나올 때도 된 것 같다. 어느 한 철은 푸르는 녹음을 만들어 그늘에 쉬게 하는 아량도 넓어진 것 같다. 봄이 가까운 이월이다. 나도 이젠 점점 여위어 가는 고로쇠(孤老衰)나무가 아니라 생명수를 길어 올리는 고로쇠(骨理水)나무가 되어 내 사랑의 골수로 키워야 할 아이들의 목마른 성장판을 위해 이 봄 온 몸의 모세 혈관까지 열고 생동의 푸른 기운을 들이마셔야 한다. 기꺼이 자신의 수액을 보시하는 고로쇠 나무처럼 잔설이 성성한 산기슭에서 두 팔을 벌려야 한다. 잎이 돋고 꽃이 필 때까지... 꽃봄이 멀지 않다.
2006.2.5 일 먼 숲
■ 고로쇠나무는 이른봄에 나무줄기에 상처를 내면 상처틈을 타고 약수(藥水) 또는 풍당(楓糖)이라고 하는 수액이 흘러나오는데 한방에서는 이 수액을 약수라 해서 체질개선에 쓰거나 신경통·위장병 환자들에게 마시게 하고 있으며, 또한 뼈를 튼튼하게 해주기 때문에 골리수(骨理水)라고 부르기도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