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 숲에서 오솔길까지

단골집같은 인정이 그리운 요즘

먼 숲 2007. 1. 26. 07: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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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추위가 제법 쌀쌀하게 지나갔다. 입동을 지난 후 이미 절기는 겨울로 들어서서 초겨울로 급강하한 추위는 두꺼운 외투를 껴입게 한다. 그러나 요즘은 아무리 옷을 껴입어도 세파의 찬바람은 뼈 속까지 스며드는 북풍이 되어 무거운 어깨가 시리고 마음엔 살얼음이 어는 듯 한 체감온도를 느낀다. 줄곧 시끄럽던 한 해의 살림살이가 쪽박 난 살림처럼 모양이 엉망이 되어 그 수렁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언제 갈라설지 모르는 이득 없는 싸움의 파행으로 치닫고 있다. 바깥은 이미 희망의 꼬투리라곤 끝도 보이지 않는 황량한 벌판에서 한 조각 도덕이란 양심까지도 뭉개져서 희미한 달빛마저 사라진 암흑이 아니던가. 산다는 것이 삶의 이정표조차 없는 빙판 길을 미끄러지듯 휘청대며 걷는 느낌이다. 그렇게 겨울은 많은 노숙자를 지하도로 몰면서 싸늘한 기온으로 찾아오고 보이지 않는 삶의 한파는 더욱 오그라드는 추위로 몰아치고 있다.


가까운 지하도에 오래 전부터 낚시의자 하나 놓고 구두 뒷 굽에 부치는 작은 덧창을 좌판에 늘어놓고 닳아버린 구두 굽을 수선해 주시던 할아버님이 계셨다. 대개 새 구두를 두세 달 신으면 뒷 굽이 한쪽으로 약간 기울면서 닳게 마련이다. 팔자걸음을 걷는 것인지 아니면 중심을 못 잡는 것인지 구두굽은 비스듬하게 기울면서 닳았다. 그런 구두에 작은 보조 굽을 덧대주는 수선으로 몇 해 동안 그 지하도에서 신기료 할아버지가 웅크리고 앉아계셨다. 나도 처음엔 지하도 네거리에서 구두 굽에 덧 굽을 대는 동안 시꺼먼 슬리퍼를 신고 서서 기다리는 게 싫어 나중 써비스룸에 맡기면 될텐데 하고 지나치다가 굽갈이가 되지 않는 신이라 그 작은 덧 굽을 대보았다. 단 돈 천원에 덧붙인 3센티정도의 두께가 기운 걸음의 중심을 무척이나 바르게 잡아주는 느낌이면서 새 구두 같은 기분까지 들게 했다. 그리고 그 덧 굽을 새로 갈아 끼우면 오래도록 신발의 모양이 변하지 않아 그 경제적인 수선을 정기적으로 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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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내 구두의 덧 굽도 나달나달하게 닳아 갈아 끼워야 하는데 얼마 전 가을부터 그 할아버지가 보이지 않는다. 구두 닦는 곳에서도 천 원짜리 싼 수선은 하지 않는다 하니 이제 내 구두는 점점 기울기가 심해질 모양이다. 몸 져 눕지 않으시면 나오시지 않을 꼬장꼬장하신 할아버님이셨는데 오래 안보이시니 어디가 아파 누우신 것 같다. 세월을 이길 장사는 없다고 아마도 시든 낙엽처럼 앓고 계신 것은 아닌지 궁금해진다. 이렇게 소소한 자리인데도 가끔 크게 빈자리로 느껴지는 일상의 모습들. 길들여졌던 생활이 조금의 변화에 맞닥뜨려져 겪는 서먹함이 보이지 않게 불편하다. 우린 한 때 단골이란 말이 아주 친숙하게 쓰였다. 단골손님이란 노래처럼 안 보이면 왜 안보일까 하고 걱정하고 그리워하는 이웃처럼 내 주위에 낯설지 않고 편한 사람들이 정을 나누고 살았다. 단골장사에 생사를 걸 정도로 상거래에도 끈끈한 관계를 이어 온 신용사회가 아니었던가.


나만의 입맛에 맞는 음식점, 앉아만 있어도 내 마음을 읽고 알아서 깎아주며 세상사의 정담을 나누는 이발소, 필요한 것을 고르고 그냥 "달아놔 주세요" 하면 외상을 주는 구멍가게, 늦게 찾아가도 군소리 없이 물건 챙겨주고 덤을 빼놓지 않는 야채가게 아줌마, 매끈하고 이쁘진 않지만 흠 있고 못생겨도 달고 향기로운 과일을 골라주는 복스런 과일가게 아줌마, 수북하게 됫박질을 해 가져다 놓은 참깨, 들깨를 지켜보지 않아도 에누리 없이 그 고소하고 진한 기름을 믿을 수 있게 짜 주는 기름집 등 우리 생활 주변은 단골로 이루어진 따듯한 이웃으로 이루지지 않았던가. 그런데 지금은 어떠한가. 믿고 맡기기는커녕 감히 외상 이야기도 꺼낼 수 없이 그 자리에서 금을 긋는 야박한 사회다. 한 자리에서 오래 버티지 못하게 변하는 약육강식의 싸움에서 우리의 단골은 이미 해체의 위기 속에 있거나 사라져 버리고 수시로 변하는 이웃과 대형 할인마켓의 손아귀에서 숨도 못 쉬고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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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용과 정이 아닌 가격경쟁의 밀리기에서 손님은 진열대에서 스스로 골라 선택하는 물건과의 거래를 택하고 있다. 사람과 사람이 쌓아 온 친분과 정이 아닌 단지 필요한 물건만 사고 그에 따른 물건값만 지불하는 메마른 거래에 익숙해져 간다. 재래시장에서 느끼던 인정이 그리워진다. 장작불에 구워지는 구수한 고구마향기 같은 단골집의 넉넉한 인심이 그리워지는 것이다. 비닐 랩으로 포장되어져 정가가 붙여진 상품이 아닌 단골가게 주인이 듬뿍 집어주는 정확하지 않지만 푸짐해 보이는 량의 상품을 주섬주섬 담아보고 싶다. 나를 보고 반가워 서 인사도 해주고 너스레에 수다도 떠는 단골주인의 미소와 귀가의 골목길에서 하루의 찌꺼기를 비워내려고 들어서는 목로주점의 소주잔과 따끈한 국물, 그리고 온화한 촉수의 백열등 불빛이 그리워지는 겨울이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이 삭막하고 단절된 사회에서 " 안녕하세요" 하며 반색하는 단골가게와 단골손님의 정은 얼마나 넘치는 사랑인가. 늘 발길이 머무는 곳이 있어 그곳에서 편하게 믿고 내 맡기는 여유가 그리워지는 것이다. 사실 내 자신조차 마음을 열지 않고 그런 단골 같은 인정을 바란다는 것은 욕심일 것이다.

 

엊그제 노숙자 신세인 불쌍한 인생에서도 사백 만원이란 남의 돈을 몰래 집어넣기가 양심이 꺼려 밤 새 잠도 오지 않고 불안해 자수했다는 정직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몇 백 억을 꿀꺽하고도 해외로 도피하거나 뻔뻔한 얼굴로 죄스런 마음도 없이 만성적 도덕 불감증에 빠진 사람들이 오히려 많은 선량한 사람들에게까지 그 증세를 전염시키는 요즘이다. 허황되게 정도가 지나치면 감각마저 마비되는가 보다. 나도 가끔 그런 횡재는 없을까 하는 환상도 꿈 꿔 보니 어쩌다 이런 한심한 생각까지 하게 되는지 부끄럽다. 하찮은 일이지만 항상 자신의 위치에서 묵묵히 자리를 지키고 욕심없이 사는 민초들. 그들의 인정과 양심이 푸른 초원처럼 기름질 때 그 사회는 건강하고 시들지 않는 푸르름을 유지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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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제부터인지 산업화의 급격한 발전은 보이지 않는 튼실한 기초는 무시하고 사상누각 같은 마천루만 꿈 꾼다. 모두 상대적 빈곤감을 느끼면서도 위만 쳐다보고 살려고 한다. 천천히 생각하며 걸어 오르는 계단을 피하고 수직상승의 엘리베이터에 길들여 살고 있다. 채워지지 않는 꿈만을 안고 사는 젊은 사람들이 풍선처럼 둥둥 떠다니며 살고 있는데도 한 술 더 떠서 사회풍조는 그러한 삶을 부추기거나 방임하는 경향이 더 큰 것 같다. 모든 것이 급변하는 세태라고 단정짓기엔 우린 너무 많은 것을 잃어가고 있는가 보다. 무엇을 잃어버리고 사는지조차 모르게 휩쓸려가고 있다. 이제 돌아보면서 그 빈자리를 그리워하고 잊고 있던 것을 생각해봐야 하지 않을까. 내게 늘 편하게 대해 준 이웃과 벗, 그리고 단골과 같이 친숙하게 지내던 많은 정든 것들에 대해서 조금은 소중하고 살갑게 대해야 하지 않을까. 무심히 생각했던 작은 구두 뒷 굽의 기울기가 불편하게 느껴지듯 꿋꿋하게 지하도를 지키던 할아버지의 안부가 궁금해지듯이 보이지 않던 사소한 것에 대한 애착을 느껴보는 한해의 끝자락이다. 이 겨울이 지나면 신기료 할아버지가 다시 나오시길 바라면서 가끔은 바람 부는 거리에서 안도현 시인의 이 시를 생각해 본다.


너에게 묻는다


                   -안도현-


연탄재 함부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


나는 누구를 위하여 따듯한 연탄불이 되었던가?
나에게 묻는다.

 

2000. 11.25일. 먼    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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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김선규 기자의 겔러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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