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추위가 제법 쌀쌀하게 지나갔다. 입동을 지난 후 이미 절기는 겨울로 들어서서 초겨울로 급강하한 추위는 두꺼운 외투를 껴입게 한다. 그러나 요즘은 아무리 옷을 껴입어도 세파의 찬바람은 뼈 속까지 스며드는 북풍이 되어 무거운 어깨가 시리고 마음엔 살얼음이 어는 듯 한 체감온도를 느낀다. 줄곧 시끄럽던 한 해의 살림살이가 쪽박 난 살림처럼 모양이 엉망이 되어 그 수렁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언제 갈라설지 모르는 이득 없는 싸움의 파행으로 치닫고 있다. 바깥은 이미 희망의 꼬투리라곤 끝도 보이지 않는 황량한 벌판에서 한 조각 도덕이란 양심까지도 뭉개져서 희미한 달빛마저 사라진 암흑이 아니던가. 산다는 것이 삶의 이정표조차 없는 빙판 길을 미끄러지듯 휘청대며 걷는 느낌이다. 그렇게 겨울은 많은 노숙자를 지하도로 몰면서 싸늘한 기온으로 찾아오고 보이지 않는 삶의 한파는 더욱 오그라드는 추위로 몰아치고 있다.
신용과 정이 아닌 가격경쟁의 밀리기에서 손님은 진열대에서 스스로 골라 선택하는 물건과의 거래를 택하고 있다. 사람과 사람이 쌓아 온 친분과 정이 아닌 단지 필요한 물건만 사고 그에 따른 물건값만 지불하는 메마른 거래에 익숙해져 간다. 재래시장에서 느끼던 인정이 그리워진다. 장작불에 구워지는 구수한 고구마향기 같은 단골집의 넉넉한 인심이 그리워지는 것이다. 비닐 랩으로 포장되어져 정가가 붙여진 상품이 아닌 단골가게 주인이 듬뿍 집어주는 정확하지 않지만 푸짐해 보이는 량의 상품을 주섬주섬 담아보고 싶다. 나를 보고 반가워 서 인사도 해주고 너스레에 수다도 떠는 단골주인의 미소와 귀가의 골목길에서 하루의 찌꺼기를 비워내려고 들어서는 목로주점의 소주잔과 따끈한 국물, 그리고 온화한 촉수의 백열등 불빛이 그리워지는 겨울이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이 삭막하고 단절된 사회에서 " 안녕하세요" 하며 반색하는 단골가게와 단골손님의 정은 얼마나 넘치는 사랑인가. 늘 발길이 머무는 곳이 있어 그곳에서 편하게 믿고 내 맡기는 여유가 그리워지는 것이다. 사실 내 자신조차 마음을 열지 않고 그런 단골 같은 인정을 바란다는 것은 욕심일 것이다.
엊그제 노숙자 신세인 불쌍한 인생에서도 사백 만원이란 남의 돈을 몰래 집어넣기가 양심이 꺼려 밤 새 잠도 오지 않고 불안해 자수했다는 정직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몇 백 억을 꿀꺽하고도 해외로 도피하거나 뻔뻔한 얼굴로 죄스런 마음도 없이 만성적 도덕 불감증에 빠진 사람들이 오히려 많은 선량한 사람들에게까지 그 증세를 전염시키는 요즘이다. 허황되게 정도가 지나치면 감각마저 마비되는가 보다. 나도 가끔 그런 횡재는 없을까 하는 환상도 꿈 꿔 보니 어쩌다 이런 한심한 생각까지 하게 되는지 부끄럽다. 하찮은 일이지만 항상 자신의 위치에서 묵묵히 자리를 지키고 욕심없이 사는 민초들. 그들의 인정과 양심이 푸른 초원처럼 기름질 때 그 사회는 건강하고 시들지 않는 푸르름을 유지하지 않을까.
언제부터인지 산업화의 급격한 발전은 보이지 않는 튼실한 기초는 무시하고 사상누각 같은 마천루만 꿈 꾼다. 모두 상대적 빈곤감을 느끼면서도 위만 쳐다보고 살려고 한다. 천천히 생각하며 걸어 오르는 계단을 피하고 수직상승의 엘리베이터에 길들여 살고 있다. 채워지지 않는 꿈만을 안고 사는 젊은 사람들이 풍선처럼 둥둥 떠다니며 살고 있는데도 한 술 더 떠서 사회풍조는 그러한 삶을 부추기거나 방임하는 경향이 더 큰 것 같다. 모든 것이 급변하는 세태라고 단정짓기엔 우린 너무 많은 것을 잃어가고 있는가 보다. 무엇을 잃어버리고 사는지조차 모르게 휩쓸려가고 있다. 이제 돌아보면서 그 빈자리를 그리워하고 잊고 있던 것을 생각해봐야 하지 않을까. 내게 늘 편하게 대해 준 이웃과 벗, 그리고 단골과 같이 친숙하게 지내던 많은 정든 것들에 대해서 조금은 소중하고 살갑게 대해야 하지 않을까. 무심히 생각했던 작은 구두 뒷 굽의 기울기가 불편하게 느껴지듯 꿋꿋하게 지하도를 지키던 할아버지의 안부가 궁금해지듯이 보이지 않던 사소한 것에 대한 애착을 느껴보는 한해의 끝자락이다. 이 겨울이 지나면 신기료 할아버지가 다시 나오시길 바라면서 가끔은 바람 부는 거리에서 안도현 시인의 이 시를 생각해 본다.
2000. 11.25일. 먼 숲
<사진 : 김선규 기자의 겔러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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