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 숲에서 오솔길까지

虛 空

먼 숲 2007. 1. 26. 0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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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사가 얼추 지나간 봄부터다.
아직 프라타너스는 주렁주렁 지난 꽃씨를 달고
잎도 피지 못한 채 늑장을 부리며 긴 하품을 하는 사월
공원가 아이들 웃음소리를 따라 여기저기서 봄꽃이 벙글고 있었다

겨울내내 감옥살이처럼 갇혀 지내던 아이들이
파릇한 새순처럼 뛰쳐나온 소란스런 아파트단지 사이 대로변 귀퉁이에서
칠십은 족히 넘으신 할아버지가 쪼그리고 앉아 덤블링판을 조립하고 계신다.


둥근 쇠파이프의 뼈대를 맞추고
스프링에 둥근 원형매트의 고리를 연결하며
느슨한게 없나 촘촘히 점검을 하신다.

할아버진 몇 해전부터 그 자리에 덤블링 놀이기구를 설치했는데
코흘리개부터 주로 삼사학년의 어린이들의 놀이터가 되어
얼마만큼의 돈을 내고 뛰어노는 할아버지의 일터인 셈이다
볕좋은 날엔 날마다 놀이터 개장을 하셨는지 모르지만
나는 대게 좀 이른 퇴근길인 토요일 오후에 그 자릴 지나게 된다.

 

팽팽한 매트위를 아이들은 용수철처럼 튀어 오르고
뱅그르르 구르고 엎어지고 자빠지고 난리가 아니다
큰 아이가 무거운 몸의 무게로 구르면 작은 아이들은 까르르 넘어가면서
동그랗게 몸을 말며 튀어 오르기를 반복한다
그 주위를 어른거리던 봄볕이 우르르 몰려서 구경하다가
순식간에 아이들의 소란에 하얗게 부서져 버리곤 했다.

 

나는 길을 가다 말고 멈춰서 그 푸른 도약의 바운딩에 정신이 팔려
유년의 시간으로 뛰어 오르는 환상에 빠지곤 했다
마치 널을 뛰거나 그네를 타면서 힘껏 발을 구르면
담장 너머 먼 세계가 다가오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지는 것처럼

나는 이 현실의 벽을 넘어 먼 기억속을 오가고
덤블링을 하는 아이들의 높이는 하늘로 솟아 올라 밝고 환했다.

 

새싹처럼 솟아 오르는 아이들의 모습도 즐겁지만
유독 내 눈길이 멎는 또 하나의 숨은 볼거리가 있다.
놀이기구 옆의 리어카에 매어 놓은 낡은 판대기에 써놓은 노래다
허름하게 낡아버린 베니어판 조각에 할아버지가 직접
조용필의 노래 "허공"의 가사를 나이 든 필체로 써 놓으셨다
마치 팝콘처럼 튀어오르는 아이들의 놀이기구 옆에
할아버진 왜 "허공"이란 노래를 적어 놓으셨는지 아이러니컬 했다.

 

『꿈이였다고 생각하기엔
   너무나도 아쉬움 남아
   가슴 태우며 기다리기엔
   너무나도 멀어진 그대
   사랑했던 마음도 미워했던 마음도
   허공속에 묻어야만 될 슬픈 옛 이야기
   스쳐버린 그날들 잊어야할 그날들
    허공속에 묻힐 그날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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쿵쾅거리며 노래를 틀어 놓은 것도 아니고
서툰 글씨로 강조하듯 메직으로 적어 놓은 허공의 가사들이
아이들의 꿈을 꾸는 듯한 웃음과 해밝은 봄볕사이에서
인생은 허무한 허공이라고 설명하듯 칙칙한 활자로 서 있었다
할아버진 햇살처럼 부서지는 아이들의 웃음과 발돋음 사이에서
삶이 한순간 꿈이였다고 허무를 노래하고 계시는 것 같았다.

그 꿈처럼 소란스런 봄도 가고 여름이 가까와져 한 낮은 한산해지고

날로 푸라타너스 길가는 터널을 이루며 서늘한 녹음으로 어두워졌다.


엊그제 지나치다 보니 할아버진 덤블링 기구를 보수하시고 계신다
봄 새 아이들이 뛰고 나니 용수철이 늘어지고 이어진 천이 뜯어져 있었다
아이들의 몸부림에 팽팽했던 매트도 축 처지고 낡아 있었다
무심하게 앉아 큰 바늘로 그믈 보수하듯 찢어진 곳을 꿰메는 할아버진
당신의 주름진 세월의 고랑을 메꿀 수 없기에 그 노래가사를 적은것은 아닐까?

화사했던 봄이 간 사이 간판처럼 내걸던 허공의 노래 가사가 바뀌었다.


현철의 "사랑은 나비인가봐"을 적어 놓으셨다
봄이 나비처럼 날아간 것일까, 그 역시 의미심장한 노래 가사다.
나비처럼 날으며 덤블링을 하는 아이들의 가벼운 날개짓도 허무하다는 듯
할아버진 서툰 맞춤법으로 노래 가사를 적어 놓았다.
나비처럼 날아간 게 어디 사랑뿐일까
나비처럼 날아간 청춘, 그 돌아올 수 없는 세월을 노래하시는 건 아닐까
 

『고요한 내가슴에

   나비처럼 날아와서
   사랑을 심어놓고
   나비처럼 날아 간 사람
   내 가슴에 지울수 없는
   그리움 주고 간사람
   그리운 내사연을 뜬 구름아 전해 다오
   아아아 아아아아아~~~~
   사랑은 얄미운 나비인가봐 』

 

어쩌면 우리 인생은 저 유행가 가사처럼 통속적이거늘
지나고 나니 나비처럼, 허공처럼 구름같은 인생인걸
나는 꿈을 꾸며 고상한 허무를 노래하려 하는 건 아닌지
해체된 채 뼈만 남아 비에 젖어 가는 덤블링 놀이터를 지날 때마다
혼자 쓸쓸히 "허공"을 부르며 간다
비록 나비처럼 얄굿게 날아가는 세월이지만
내년에도 할아버지가 저 자리에서
하늘높이 치솟는 아이들의 웃음소릴 듣고 계시길 빌어본다

곧 긴 雨期가 시작되려나 보다

여름을 향한 녹음의 터널길에 보도블럭이 꿉꿉하게 습기로 젖어있다.

 

2004.7.2일. 紫雲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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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이상원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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