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 생의 푸른 오월 』
며칠 전 늦저녁에 할인마트를 다녀왔다. 아이들 봄소풍 준비도 있고 예전에 어쩌다 밤에 들르면 마감시장 전 신선도가 떨어진 야채나 과일,생선등을 싸게 팔아 과일을 많이 먹는 우린 떨이판매에서 싸게 과일을 사면 한참을 아껴먹게 되고 또 그 작은 에누리가 무슨 불로소득을 얻은것처럼 재미있기도 했다. 그러나 그 날은 마감시간이 가까와져도 싸게 팔 기미도 없고 예전같지 않게 손님도 한산하다. 올들어 더 어려워진 경기의 여파가 피부로 느껴진다. 백화점 구경해 본지도 오래되었지만 이젠 대형 할인마트까지 찬바람이 부는 것 같다. 국제경기의 여파에 일제히 생필품값이 올랐다. 그러나 한 번 오른 물가가 내려 올리는 없고 굳어지고 어려워진 경기가 언제 다시 되살아날지 앞이 보이지 않는 것 같으니 그만큼 서민들의 주머니 사정만 힘겨워진 셈이다.
한달 한달 살아가는 살림살이가 넉넉치 않다는 것은 내가 더 손금보듯 환한데 함부로 카드를 긁거나 대책없는 소비는 불보듯 환한 것이다. 여직 로또 한 번 사지 못한 주변머리에서 어디서 일확천금이 떨어질거란 꿈은 아예 꿀 수도 없고 갖고 있는 부동산도 없으니 재산이 뻥뛰기가 될 확률은 더 희박하다. 한 때 남들 따라 주식투자하다 날마다 뒷북만 치고 헛물만 켠 채 결국 여윳돈 까먹고 그나마 소생할 기미도 없는 잔존 주식은 완전히 묻어둔 채 꼴도 보기싫다고 아는 척도 않한다. 돈 버는 것엔 잼뱅인 주제에 돈에 욕심을 부리는 건 나로선 위태로운 일이니 가만 있는게 도와주는 셈이다. 숫자 셈은 아직도 딸에 수준이나 될까, 참으로 셈하는 게 싫다. 그러니 돈에 관한 건 아내에게 일임 해 그 수렁에서 헤어날 수 있으나 쥐꼬리만큼 벌어다 주는 가장의 형편으로 선 쇼핑길에서 아주 작아지거나 체면이 서지 않는다.
생일이나 결혼 축하기념일에 장미를 사던 햇수가 점점 아득하게 멀어져 간다. 될 수 있는 한 꼭 필요한 것으로 선물을 사고 꽃은 마음뿐이다. 우리도 여느 부모처럼 자식사랑엔 아끼지 않으려하면서도 넘치지 않으려 하고 있다. 한심스러운 건지 아니면 남과 똑 같은 속물인지 그나마 아이들 사교육비는 아끼지 못하는 셈이다. 넉넉치 않은 살림에서 학원비는 버겁게 큰 비중이다. 두과목만 챙긴다지만 두 아이의 몫이니 적은 돈은 아니다. 여유없는 살림에서 사교육비를 챙기는 건 아깝긴 해도 드는 만큼 조금씩 효과가 있고 아이들이 착실히 따라주기에 헛돈을 쓰는 것 같은 억울함은 들지 않기 때문이다. 그 옛날 과외커녕 갖고싶던 동아전과 하나 없이 공부하던 내 어린시절과는 다른 환경이니 나 몰라라 할 순 없는 실정이다. 품안에 자식이라고 어릴 땐 그저 이쁘기만 하던 아이들이 해마다 몰라보게 커지면서 어느덧 부모의 사랑과 경제적 여건에 따른 속걱정은 반비례의 사선을 그리고 있었다. 아이들은 커가고 부모는 늙어가며 작아지는 확연한 반비례 현상이다.
그러나 한 해 한 해 커가면서 아이들에 대한 희망과 사랑은 그 반대로 무성하게 커간다. 바라만 봐도 대견하고 기쁘다. 아직 초등생인데 제 어미만한 신발을 신고 키도 그만큼 자라 아이들은 자주 제 어미와 등을 맞대고 키재길 하며 엄마의 키를 넘보는 데 내 후년엔 어미를 추월할 추세다. 마음도 커져 부모가 없어도 스스로 제 일을 챙기고 마음 걱정을 나눈다. 기뜩하게 아직 순수한지 가욋돈도 쓸 줄 모르고 별다른 욕심도 없다. 커진만큼 아직도 무엇을 요구하거나 원하는 것을 사달라고 말하지도 않는다. 아직은 부모의 사랑에 배불러 하고 부족한 것엔 참을 줄도 안다. 과용을 가르치지 않은 덕일수도 있다. 그러나 그 애들도 어느날 커진 몸체만큼 많은 걸 요구할 지도 모른다. 하지만 물질적 충족에 길들여지지 않고 바르게 자란다면 잘 적응할 것이다. 지금 난 겉으로 드러나는 삶의 비교치는 남보다 많이 부족할 수도 있고 반면 남보다 훨씬 나을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 맘속에 믿고 의지하는 가족이라는 범주에서 느끼는 사랑과 행복의 기대치는 비교할 수 없이 더 만족하고 부자일수도 있다. 어느듯 아이들이 커 집이 비좁아 보인다. 좀은 답답할지언정 그만큼 꽉 들어찬 것 같아 따습게 느껴지는 내 생의 푸른 오월이다. 바라는 것은 없어도 채워지는 것 같은 아이들의 푸르름이 시들어간다 말할 수 있는 우리의 하얀 세월을 푸르게 상쇄시키는 행복도 있다.
오월이 되어 가정을 돌아 볼 시간이 많은 요즘 글을 쓰다 보니 의도와는 다르게 엉뚱한 방향으로 흘렀다. 챙피할 것도 없지만 감추고 싶은 살림살이를 드러내며 누추한 삶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그런 현실이 내가 사는 모습이고 삶의 현주소다. 아직 갈 길은 많이 남았는데 가끔은 내몰리는 것 같은 일상에서 내 스스로 위기의식을 느끼며 사는 나이이기도 하다. 이 글을 쓰며 늘 낙관적인 마음으로 우린 부자로 살거라며 가정을 지탱해주고 따라 준 아내와, 무엇보다 착하고 올바르게 커 온 아이들에게 고마움과 사랑을 전하고 싶다. 조금 부족해도 탓하지 않고 적은 살림을 꾸려가며 늘 화목한 가정을 가꿔 온 엄마라는 자리가 향기로운 꽃자리 같다. 그리고 오히려 앞으로 어떤 어렵고 힘든 시기가 올 지도 모른다. 그 때도 늘 우리 가족 모두에게 아내는 힘이 될 것이다. 사랑스런 아이들도 지금보다 더 잘 헤쳐나갈 수 있게 꿋꿋하고 지혜롭게 자라 더도 말고 오월의 푸른 신록처럼 커주길 바라는 마음이다.
2004.5.6일. 먼 숲
<그림 백 지 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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