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움으로 저물다

그 섬으로의 여행

먼 숲 2011. 9. 6. 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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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현듯 떠난 여행은 부안 능가산 내소사를 들러 섬으로 갔다

내소사 전나무 숲길로 들어서자 숲향기가 가을바람에 실려 머리가 청명해진다

오래전부터 그리워한 내소사 숲길을 홀로 호젓하게 걸었다

오랜 세월의 풍화로 빛바랜 단청과 아름다운 꽃문살과 단아한 전각들을 마음에 새긴다

백팔배를 올려 뻣뻣해진 다리를 주무르며 시내버스를 기다리는 한가로운 시골 정류장엔

잠자리떼를 따라온 초가을 바람도 조용히 앉아 기다리고 있다

젓갈냄새와 소금기 바람이 스쳐가는 곰소를 지나 구불구불 시골길을 지나는 버스

허리굽은 할머니들 서넛이 고추방아를 찧으려 마른 고추를 한 짐씩 안고 계신다

김장모종을 사서 실은 할머니들이 코스모스 하늘거리는 마을 동구밖에서 내리면

따가운 여름햇살도 따라 내리고 산그림자가 버스가 떠난 느린 시골길을 지운다

내 생의 그림자도 어느덧 멀리 떠나와 낯선 변두리를 돌고 있다

드문드문 보이는 쓰러진 폐가와 빈 집들이 늙어버린 시골에서 방치된 세월의 외로움을 보여주고

길목마다 몇백년된 팽나무 고목들이 장승처럼 빈 마을을 지키고 서 있을 뿐이다

 

 

    

  

 

 

 

포구의 뱃시간은 가끔 변수가 많아 기다림이 필요하다

그런 기다림의 연습은 섬을 여행하는 여정에서는 필수적이다

드문 뱃시간에 때를 놓치고 다음 배를 기다렸는데 그 배마져 오늘따라 결항이다

두세시간을 항구의 갈매기처럼 바닷가를 서성거리며 선선한 가을바람을 가슴으로 안는다

늘 시간과 계획에 쫓기다 보면 옆을 볼 수 없었는데 예상치 않은 결항이 넉넉한 여백을 내준다

격포항에서 배를 타면서도 옆으로 지나치던 채석강을 천천히 느린 걸음으로 바라보고

나는 철지난 나그네가 되어 한산한 주변 상가를 들러 맛깔스럽고 짭조름한 젓갈도 맛본다

철이 지났다는게 이리 한적하고 쓸쓸한가, 썰물처럼 빠져나간 피서철의 그림자가 고즈넉하다

때론 휴가도 한 발 물러서서 이렇게 게으르고 느린 시간을 만끽하는 여유도 괜찮은 듯 싶다

서해에 밀감빛 저녁 노을이 물들기 시작할때 섬에 도착했다

고요로운 오후의 섬은 먼저 온 선선한 가을바람이 손님을 맞이하고 산길엔 가을꽃이 곱다

한여름 붉던 섬해당화는 꽃사과 같은 열매로 다시 꽃을 피우고

섬을 홀리게 했던 섬나리대신 뚝깔, 마타리, 잔대꽃같은 가을 들꽃이 나그네를 반긴다

가을이라설까. 서해의 낙조가 단풍처럼 붉고 따사롭게 불탄다

망망한 바다 한가운데로 노을을 실은 통통배가 사라지고 있다

석양을 배경으로 저물어가는  두 사내가 등을 보이며 쓸쓸한 풍경이 된다 

 

 

 

 

 

 

 

    

막막한 섬의 밤은 무서우리만치 적막하다

파도소릴 듣고 바다를 짐작하고 바람소릴 듣고 언덕을 더듬는 캄캄함속에서 밤은 깊어간다

사방이 바다라 파도를 베고 잠을 청하려니 철석이는 파도소리에 잠을 이룰 수가 없다

예민해진 청각 가득히 끝없이 밀려가고 밀려오는 파도소리가 빗소리처럼 퍼붓는다

파도에 뒤척이며 선잠을 잔 사이 새벽이 오고 창밖이 푸르다

깨어나도 몸이 바다위에 떠 있는 듯 혼몽하니 물소리에 젖어 있다

새벽부터 뒤흔드는 풍랑이 먼 바다로부터 하얗게 물거품을 토하며 갯바위로 달려와 부서진다

산처럼 밀려오는 거센 파고에 섬의 뿌리가 진저릴 치는 듯 하다

창창한 한낮에 바람이 미친듯 마왕처럼 섬을 뒤흔들어

하루종일 절벽을 때리는 해일을 보며 두려움의 탄성을 내지른다

그렇게 바람에 갇히고 파도에 갇히고 섬에 갇혀 막막하게 요동치는 바다만 바라본다

섬에서 사는 사람들의 인내와 마음의 평정심이 뭍에 사는 사람과는 사뭇 다를 듯 싶다

유배지에서 보내는 시간의 흐름은 밀려가고 밀려 올 뿐 아무 의미도 없는 듯 느껴진다

종일 바다를 바라보고 있자니 몸부림치는 바다가 인생보다 더 쓸쓸하고 고독해 보인다

점점 섬은 풍랑에 깎여 여위어 가고 적막한 외로움에 수척해져간다

나는 아직 섬에 갇혀 있기엔 뭍에 내린 삶의 의무와 미련의 뿌리가 깊다

속세의 비린내를 버릴 수 없어 아직 이 절간같은 섬이 답답하다

그러면서도 마음은 더욱 아득한 망망대해 수평선 끝에 점을 찍는다

아직도 부유하며 떠도는 마음자락이 그 곳에서 다시 섬이 되려 하고 있다

 

 

2011년 9월 8일     먼    숲

 

 

 

      

 

 

 

 

 

음  악  들

 

                                                               -  박   정   대 -

 

  
너를 껴안고 잠든 밤이 있었지.
창밖에는 밤새도록 눈이 내려 그 하얀 돛배를 타고 밤의 아주 먼 곳으로 나아가면
내 청춘의 격렬비열도에 닿곤 했지,
산뚱 반도가 보이는 그곳에서
너와 나는 한 잎의 불멸, 두 잎의 불면, 세잎의 사랑과 네 잎의 입맞춤으로 살았지.
사랑을 잃어버린 자들의 스산한 벌판에선 밤새 겨울밤이 말달리는 소리,
위구르, 위구르 들려오는데 아무도 침범하지 못한
내 작은 나라의 봉창을 열면 그때까지도 처마 끝 고드름에 매달려 있는 몇 방울의 음악들,
아직 아침은 멀고 대낮과 저녁은 더욱더 먼데
누군가 파뿌리 같은 눈발을 사락사락 썰며
조용히 쌀을 씻어 안치는 새벽,
내 청춘의 격렬비열도엔
아직도 음악 같은 눈이 내리지 

 

 

박정대 시집 『내 청춘의 격렬비열도엔 아직도 음악같은 눈이 내리지』 중에서

 

 

■ 섬을 허물듯 몰아치는 파도소리로 잠못 드는 밤, 주문처럼 나는 이 詩를 생각했다

    내 마음의 수평선 , 그 끝에 또 다른 섬  격 렬 비 열 도 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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