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빛을 닮다
법정스님의 의자
법정스님이 향기로운 청매화처럼 떠나신지 한 해가 되었는데 스님의 일대기가 영화화 되어 상영하는 줄 몰랐다
우연히 이태석신부의 영화 "울지만 톤즈"를 상영했던 정독도서관 앞의『 아트선재 』를 검색하다보니
법정스님의 의자 라는 영화를 상영하고 있었다
마침 요새 한 주를 한가로이 보내던 터라 홀로 호젓하게 오후 시간을 내어 삼청동길로 나셨다
안국동 입구에서부터 골목길을 따라 유월의 녹음이 깊어져 가고 거리는 한적하다
다른 영화관에서도 상영중인것 같은데 이곳은 작은 소극장이라선지
관객이라곤 곱게 단징하신 젊은 할머니들 모임과 서너명의 수녀님이 전부다
그 단촐함과 여백 사이로 영상 가득 고적한 산사의 풍경과 넉넉하면서도 그윽한 최불암씨의 나레이션이 펼쳐진다
입적후 한동안 매스콤을 통해 많이 알려진 스님의 일생을 다큐멘터리로 엮은거라 부족한 내가 사족을 달 필요는 없다
다만 사람과의 인연은 언제 어디서든지 이어지기도 하고 스치기도 하는 데 스님과 나의 인연도 그러한지
철 들고 어느순간 내 생의 칠할은 법정스님의 그림자를 따르고 있었다
그 처음이 열일곱쯤일까, 나는 농촌 4H운동이 한창이던 1970년말쯤 처음 지어진 마을회관에 모여
그 당시 농촌 경진대회 같은 것을 도와주느라 들렀다가 가난한 도서목록에서 "샘터" 라는 작은 잡지를 보았다
거의 책 끄트머리에 실렸던 법정 스님의 글을 처음 읽은 순간 스며드는 감동으로 그 잡지 한 권을 다 본 것처럼 책을 덮었다
아마도 그 코너가 山房閑談 이였던가 좀은 오래묵은 작은 월간지 하나가 인연이 되어 근 이십년을 넘게
스님의 글을 읽기 위해 군생활과 먼 해외생활에서도 꼬박꼬박 샘터를 구독해 읽으며 얼른 새달이 오길 기다렸었다
스님은 어려운 법문이 아닌 자연속에서의 삶과 자연의 지혜와 섭리를 통해 우리에게 맑고 향기로운 순리를 일깨워 주셨다
바로 그런 자연에 대한 성찰이 스님의 글을 사랑하게 하고 그 어떤 진리보다 마음속에 흐르는 물처럼 내게 감동으로 다가왔다
그 젊은날 스님의 첫 수필집인 작은 문고판 크기의의 "무소유"는 여행할때마다 챙겨넣는 필수품이기도 했다
스님이 불일암에 안거해실때 꼬박 삼년을 지낸 군대를 제대했다
제대후 날개를 달고 날 것 같던 마음이 며칠만에 날개를 꺾인 채 추락하며 막 돌아 온 현실속에서 견디질 못했다
어떻게 사회에 적응해야 할 지 막막해 무작정 밤차를 타고 야반도주를 시도한 것이다
그 종착지가 스님이 머물던 조계산이였지만 아침에 버스를 타고 내린 곳이 송광사가 아닌 선암사였다
그 당시 불일암은 막연한 내 마음의 방랑길에서 가보고픈 종착지이긴 해도
미욱한 나로서는 법정스님 앞에 불쑥 나서서 내 인생길을 묻기엔 너무 초라하고 보잘것 없어 보였다
마음이 어두우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지라 춘삼월이였건만 그 유명한 선암사 매화도 못보고 절마당을 배회했다
마음 한 구석엔 출가를 다짐하는 먹빛 생각도 가득한데 그것도 인연인지 아무도 방황하는 젊은이를 인도하지 않는다
선암사를 지나 터벅터벅 산길을 걸어 올라 이름 모를 작은 암자에 들렀지만 스님도 부재중이다
샘물 한바가지 얻어 마시고 산 아래를 내려다 보다 송광사길을 물으니 같은 산중이라도 이 산너머 먼 거리라 한다
마음속에 둔 불일암이라도 둘러 볼 요량으로 길을 떠났으나 결국 불일암은 지금껏 마음속의 암자로 남고 말았다
그 이후 나는 신기루를 찾아 먼 사막의 나라로 일탈처럼 떠나 오랬동안 타국생활을 했다
내 고향은 지금 신도시가 된 일산의 밤가시마을인데 내가 타국생활을 하는 사이 우리 마을엔 법정스님이 다녀 가신다
70년대 중반쯤, 가난하고 소박한 우리마을 구석진 산비탈 아래의 초가집을 사서 작은 수녀님들이 기도원을 만들었다
프랑스 수녀님이 주축이 되어 새마을 운동이나 마을의 대소사까지 부역과 노동을 손수 하시며 농사까지 자급자족하셨는데
진달래가 흐드러진 봄날, 법정스님이 백마역을 지나 나즈막한 산길을 걸어 우리 마을에 있던 수녀원을 방문하신 것이다
나중 샘터에 기고하신 글을 통해서 그 사실을 알게 되었지만 가까이서 뵙지는 못했어도 난 무척 기쁘고 마음 설렜다
스님은 그렇게 오래전부터 종교의 벽을 허물고 맑고 향기롭게 사시던 수녀님들과의 인연도 아우르며 사신 것 같았다
들리던 말에 의하면 원하는 것을 오랫동안 마음에 두면 어느순간 이루어진다했던가
드디어 젊은 날 책을 통해 멀리서나마 존경하고 그리워하던 법정스님을 우연이지만 뵙게 되었다
어쩌다 서울 나들이를 하면 인사동을 거쳐 광화문 옆 불일서적이란 곳을 들르곤 했다
아마도 이십년은 훨씬 넘은 것 같은데 그 때도 잠시 그 곳에 들러 책을 구경하는데 꼿꼿한 스님 한 분이 문을 들어섰다
한 눈에 법정스님임을 알 수 있었지만 나는 스님 곁에 멍하니 서서 바라보다 두근거리는 마음만을 안고 나왔다
첫 눈에도 눈처럼 맑고 차가운 서기가 빛나 그저 그 모습을 뵙는 것 만으로도 수도승의 정기가 느껴져
감히 큰 산처럼 마음에 두던 스님 앞에 나서지 못하고 서성거리기만 했다
우숩게도 워낙 마음에 큰 스님으로 생각하다보니 키도 크신 거인이라 생각했는데 실제로 뵙니 크지는 않으셨다
그렇게 오랜 시간동안 법정스님의 맑고 지혜로운 글과 단촐한 삶과 구도 정신을 마음에 두며 그 삶을 따르고자 했는데
나는 속세의 숲에서 많은 번민과 욕심과 불만으로 아무런 향기도 없이 시들고 늙어 간다
고요로운 산중의 구도와 달리 번잡한 속세에서의 삶의 구도는 더할나위 없이 어렵고 힘겨운 고통일 수 있다
이태준의 무서록에 " 나를 가끔 외롭게 하고 슬프게 하고 힘들게 하는 모든 것은 산이였다" 라는 문장이 있다
그 말처럼 내 안에 우뚝 산처럼 서 있어 쉽게 다가설 수 없는 꿈과 이상이 이 어둔 속세에서 가끔 나를 슬프게도 한다
그러나 영화를 보면서 좀 더 세상을 살고 나서는 남은 삶이나마 간소하게 버리고 단순하게 정리하고 싶어진다
스님 또한 구도자이기에 앞서 우리와 같은 똑같은 사람이기에 한 사람의 인생길이 영화속에서 정리되고
영화를 통해 그동안 알지 못했던 스님의 보이지 않은 선행과 인간적 고뇌,그리고 냉정할 정도로 칼같은 구도정신을 본다
그러한 인생의 한 모습을 읽으며 철저한 구도자로서의 삶과 평범한 우리의 삶이 다른 길이긴 하지만
자신을 갈고 닦는 수행의 길을 보면서 나름대로 내가 살아야 할 길을 만들고 내 모습을 비춰보아야 할 것이다
영화가 끝나고서도 이미 비대해지고 게을러진 내 삶에서 다시금 마음에 두게 하는 스님의 말씀이 생각난다
사람은 뱃속에 밥알이 적어야 하고 입 속엔 말이 적어야 하고 마음속엔 일이 적어야 한다
가장 어려운 버림은 아름다운 마음을 버리는 일이다
무소유란 태어날 때 빈 손으로 온 것처럼 처음부터 없었다. 그러니 내 것은 없고 버려야 하며
남에게 줄것이 있으면 사람이 죽으면 물건도 죽으니 살아서 주어야 한다는 말씀이 화면이 꺼지도록 마음에 남았다
그리고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종교는 친절이다 라는 말씀은 새로운 깨달음을 주신다
남을 배려하고 사랑하며 헤아려주는 친절한 마음, 그것은 어떤 종교이든 공통된 진리로서 실천해야 할 덕목일 것이다
간간히 눈물 흘리며 영화를 보는 사이 스님이 앉았던 후박나무 아래의 빈 의자에
꽃이 피고 지고 낙엽이 지고 겨울이 오고 또 한 생이 저물고 있었다
2011년 6월 4일 먼 숲