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이 읽는 詩

못자리에 들어가는 못물처럼 / 장 석 남

먼 숲 2009. 6. 9. 15:45

 

 

 

 

 

 

 

 

 


   

못자리에 들어가는 못물처럼



장  석  남


누구나 혼자 있을 때는
돈걱정 여자 걱정 같은 거나 좀 면하면
못자리에 들어가는 못물 같은 것이나 생각해보면 좋다
그 못물이 못자리 한바퀴 빙 돌아
새로 한 논둑에 생긴 손자국 발자국 앞에 슬며시 머무는 것
생각해보면 좋다

그것도 아니면
못자리에 들어가는 그 못물의 소리를
하루 중 가장 조용한 시간 가운데다
앉혀보는 것은 어떤가
그 소리로써 잠자리의 곁을 삼아보는 것은 어떤가

못자리에 들어가는 못물처럼
하루나 이틀 살아보는 것은 어떤가
아니, 여러날씩
살아보는 것은 어떤가

 

 

 

           

 

 

 

촉촉한 보슬비가 찔레숲에 내리는 흐린 오후다

나는 얼마전부터 모내기가 끝난 들판의 평화로움을 그리워했다

뜬모도 끝나고 촘촘이 열과 오를 맞춰 누비옷을 바느질 한듯

 푸르른 모가 바둑판처럼 반듯하게  펼쳐진 들판

내 고향과 가까운 옛날의 김포평야나

지평선이 보이지 않는 김제평야같은 너른 들판을 생각했다

지금쯤은 웃거름을 준 거름물이 우러나

논물이 바닷물처럼 녹색을 띠기도 하고

싱싱하게 자라는 파릇한 모가 잔잔한 녹빛 바다가 되었을 것이다

간간이 하얀 백로가 유유히 논바닥을 거닐며

평화로운 행간에 쉼표를 그려 주기도 할 것이다

그런 유월의 풍경을 상상하던 차

장석남의  "못자리에 들어가는 못물처럼" 란 시를 읽게 되었다

나는 호흡을 멈추며 그의 시를 읽었다

 

나는 기억한다

 모내기 전 쟁기로 논갈이를 한 후

겨울내 논물을 잡아 두었던 윗논에서 물꼬를 트면

금방 갈아 엎은 매끄러운 블랙쵸콜릿같은 고랑사이로 스며드는 물소리를

 가끔은 모 뿌리를 튼실하게 자라게 하려고 물을 뺐다가

아침에 다시 물꼬를 틀 때 못자리로 스미는 물길의 비밀스러움을

때론 아름다운 花巳처럼, 때론 느릿한 비단구렁이처럼

고요로히 허리를 틀며 마른 바닥을 기어가는 물길의 신비로움을

또한 마른 가뭄이 오래된 먼지나는 다랭이 논에

스펀지처럼 스미는 물길의 보드라움을

그렇게 못자리에 들어가는 못물이나

마른 논바닥을 적시는 물길을 보노라면

숨을 멈추고 가만히 바라보게 된다

그 얼마나 달콤하고 평화로운 풍경인가

따스한 피돌기처럼 도는 풍경과 물소리를 시인처럼

내 잠자리의 곁을 삼는다면 머리속이 꿈결같으리라

그 내밀하고 고요로운 흐름을

하루 중 가장 조용한 시간 한가운데 둔다면 靜謐한 평화를 느끼리라

 

때로 시인의 눈은 현미경보다 더 세밀하고

 어떤 자연의 촉수보다도 예민한 지 모른다

나는 혼자만 느낄 수 있었던 비밀스런 광경을 시로 노래한 시인에게 찬사를 보낸다

그의 시를 읽으며 달콤한 유년의 기억속에서 평화로운 여유를 즐긴다

못자리에 들어가는 못물처럼
나도 하루나 이틀, 아무 생각없는 무아지경에 빠져보고 싶다

아, 그런데 세월의 흐름도 그처럼 흐른 것 같은 데 알 수 없이 슬프다

 

 

2009.6.9 일    먼    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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