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햇살이 투명하게 느껴질수록 똑같은 일에 매달려 살아야 하는 진력나는 하루가 권태롭기만 하다. 문득문득 찾아오는 이런 순간들을 견디느라 해저녁 포장마차나 호프집에 모여 술잔을 기울이며 불만과 스트레스를 털어내는 다른 사람들의 일상들을 보면서도 내 자신이 모난 성격인지 그렇게 어울리지 못하고 지나치기 일쑤다. 남들과 다른 것 없으면서도 체질적으로 술을 좋아하지 못하는 탓에 술자리를 피하기도 하지만 사실 그것은 핑계에 불과한지도 모른다. 가장 큰 이유는 어울리는 사람에 대한 편견이 크고 여럿이 모여 소란스럽게 떠들거나 필요없는 화제가 난무하는 자리에서 맞장구를 치며 맥없이 앉아있는 자리가 불편하고 지루하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점점 공동체의 생활이라며 끌려다니는 듯한 모임이나 회식자리를 피하게 되고 참 오랫동안 내 세계처럼 담을 쌓아놓고 스스로 왕따가 되어 그 안에서 자족하는 이기적인 버릇이 생겼다. 이렇게 사람 사귐에 대한 편식은 자신을 더없이 외롭게 만들기도 하지만 내 생활에 충실할 수 있고 조금은 자신의 여유를 즐길 수 있는 여백을 남겨 놓기도 한다.그러나 이젠 삶의 많은 고개를 넘어 온 중년의 나이이고 과장해서 혼자 고독하다고 말 하기도 한다. 때때로 그런 외로움의 고비가 찾아와 힘겨워 할 때 드믈게 "헤이, 꺼벙이! " 하며 서로를 찾는 친구가 있다.
그 친구는 내향적인 나와는 다르게 외향적이고 사교성이 탁월해 부풀려서 조선 팔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마당발인 친구다. 아직도 미혼이면서도 능력있으며 젊고 자유로워 항상 바람처럼 떠 돈다. 전화할 적마다 지방이나 외국에 있는 날이 많아 처음 인사가 "지금 어디 있냐"는 행선지의 물음이 먼저다. 완벽해 보이는 그도 이른 봄이나 가을이 되면 어김없이 마음이 쓸쓸하다고 허허롭게 내게 전화를 한다. 우린 서로에게 구멍 뚫린 마음을 들키거나 미리 헤아려 긴 시간 찻집에서 남자의 수다를 털어내곤 하지만 그래야 늘 그렇고 그런 우리의 사는 얘기이며 일상사다. 그래도 초등학교부터 군 생활 삼년을 같이 지내 훤하게 마음을 꿰뚫고 있는 벗이니 소소한 걸 얘기하지 않아도 대충 그 삶의 괘적을 짐작하게 된다. 그 친구가 가을이 되어선지 아니면 내 일상이 곤한 걸 알아선지 전 주에 이어 다시 음악회에 가자고 전화를 했다. 여름이 지나고부터 아침 저녁 출퇴근 길에 멀리했던 음악을 잠시 듣는 요즘이라서 오랜만에 연주회를 가자는 소린 지극히 반갑고 힘이 솟는다. 내가 유일하게 혼자 견딜 수 있었던 젊은 시절의 친구가 다양한 음악이였다. 흔쾌히 약속을 하고 KBS홀에서 만났다.
가벼운 발걸음으로 연주회장에 가니 그 친구 주위엔 여러명의 지인과 싱그런 젊음의 남녀 후배들이 있었다. 혼자일때는 가끔 음악 연주회를 찾아 다녔지만 결혼을 하고 식구가 늘어나니 여려모로 마음의 여유를 찾기 쉽지 않았다. 아이들이 어릴 때는 아이때문에 공연장을 혼자 다닐 수 없어 봄부터 가을까지 열렸던 덕수궁의 야외 음악회를 종종 찾아 다녔다. 그나마 대중들이 쉽게 접할 수 있는 음악회로 편하게 야외에서 어울려 연주회를 보고 듣는 기회가 있어 숨통이 트였는데 요즘엔 거의 사라진 듯 싶다.국민의 정서적인 삶의 질이 그러한 문화적인 공간과 어울림일텐데 어째 지금은 사는 게 전쟁터 같기만 하다. 초등학교의 고학년부터는 인성교육과는 먼 입시지옥으로 변하니 기계적인 매카니즘의 시대를 사는 현대인의 마음은 얼마나 삭막해져 가는지 가늠케 한다. 어느새 우리 아이들의 감성도 매말라져 가고 있다. 아이들과 같이 가고 싶었지만 사정상 혼자 음악회를 가야만 했다. 오늘 KBS교향악단 정기 연주회의 프로그램은 「라흐마니노프/피아노 협주곡 제3번 d단조」와 「쇼스타코비치/교향곡 제10번 e단조」였고, 피아노 연주는 러시아의 안드레이 가브릴로프다. 연주자 안드레이는 1974년 당시 차이코프스키콩쿠르에서 정명훈이 2위를 했을 때 1위를 했던 사람으로 아주 훌륭한 연주자라고 했다.
까만 연미복의 연주자들이 자리를 잡고 튜닝을 한다. 순간 내 자신도 긴장하며 흐트러진 마음을 조율하며 차분하게 자세를 잡았다. 평상시엔 라프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 1,2번을 가끔 들어 알고 있었으나 오늘 연주하는 3번은 별로 들어 본 적이 없는 듯 싶다. 나는 계절에 따라 즐겨듣는 음악도 좀은 다르다. 봄엔 경쾌하고 화사한 피아노나 아름다운 플루웃이나 클라리넷의 클래식이 좋지만 가을엔 바이올린이나 첼로의 현악기 연주를 좋아한다. 그 중 가을이 깊어질수록 현악사중주의 울림을 좋아하지만 좀은 우울하고 무거운 러시아 작곡가들의 음악을 종종 듣기도 한다. 그러기에 오늘 라프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은 무척 기대가 된다. 아름답고 애잔하고 감미로운 차이코프스키와는 다르게 라프마니노프는 러시아 서정을 대표할 수 있는 다른 음색을 가진 것 같다. 광활한 대륙과 시베리아의 평원을 느끼게 하는 웅장하고 낭만적인 음색과 러시아인의 열정과 우수까지 표출할 수 있는 라프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을 러시아의 연주자가 연주를 하니 다른 연주와 비교될 만큼 오늘 안드레이의 연주는 힘과 열정이 느껴진다. 나는 음악을 들으며 영화 닥터 지바고를 많이 생각했다. 가슴 아픈 그들의 사랑과 화면 가득 펼쳐진 설원과 러시아의 웅장한 풍경이 그가 두두리는 건반의 흐름속에서 필름처럼 스쳐 지나갔다. 환상적인 연주가 끝나고 쏟아지는 열광의 박수소리가 홀 안을 울린다. 나도 벅찬 감동을 안고 서서 힘차게 박수를 쳤다. 그 후 앵콜곡으로 연주한 감미로운 「쇼팽의 야상곡 20번」은 연주회의 백미인 것 같았다. 꿈결같이 봄 밤에 듣던 야상곡을 이 가을의 길목에서 들으니 가을볕 같은 애상으로 가슴이 저려 온다. 그 순간의 황홀감이 끝나고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이 연주되기 시작했다.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 10번은 거의 들어 본 기회가 없었다. 그의 음악은 흔하게 접하던 낭만주의를 벗어나 다소 난해하거나 불협화음처럼 시끄럽고 이해하기 어려워 기피하다보니 자연 멀어져 프로그램에 있는 그의 교향곡을 어찌 들어야 하나 하는 지루한 생각이 먼저 앞선다. 그러나 의외로 생경한 그의 음악이 졸게 하진 않았다. 계속되는 긴장과 이완감이 이어져 마치 한편의 전쟁을 보는 듯한 드라마틱한 변화를 볼 수 있었다. 교향악단의 각 파트별로의 특성을 살릴 수 있는 다양한 음색과 변화무쌍한 곡의 흐름에서 지휘자의 온몸으로 표현하는 동작은 격렬한 연주가 되었다. 우울함과 긴장이 반복되는 곡을 들으니 쇼스타코비치는 러시아 근대사를 가장 훌륭하게 표현한 음악가 같았다. 고리끼의 혁명적인 문학세계나 도스토예프스키의 어두운 심적 세계를 이끌어내듯 그의 교향곡은 음악적인 새로운 구테타를 추구했는지도 모른다. 영화에서 보던 참혹하고 음습한 시베리아 벌판의 전쟁이 펼쳐지는 듯 하고 힘찬 볼세비키 혁명군의 진군이 차가운 금관악기나 탁한 타악기속에서 울려오기도 한다. 음악과 가까워지기 위해선 선율의 흐름을 따를 수 있는 폭 넓은 상상력이 필요한 것 같다. 많은 예술이 그 시대나 자신의 환경이 배경이 되기에 비록 해석하기 어려운 난해한 쇼스타코비치의 음악이였지만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 새로운 혁명을 바라는 시민의 자세로 들으니 한결 편하고 흥미로왔다. 단지 어렵다는 편견으로 피해왔던 그의 음악도 마음을 열고 들으니 어렵긴 해도 색다른 경험이 되었다.
연주회가 끝나고 출구를 빠져 나오는 사람들의 얼굴들이 열광하던 순간이 남아 조금 상기되고 흥분된 모습이다. 이런 짧은 시간이 권태로운 일상에 큰 활력소가 되는 모양이다. 시장기가 도는 밤, 같이 왔던 사람들과 뒤풀이를 하고 싶었지만 모임 장소와 멀기도 하고 반대 방향이라 다음을 약속하고 헤어졌다. 여의도 광장을 가로지르는 공원엔 인라인 스케이트를 즐기는 동호회원들이 꽤나 많았다. 유연하게 꼬리를 물며 달리는 젊음이 부럽다. 다양한 취미와 특기를 가지고 사는 세상이건만 아직도 클래식이나 詩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아 그런 취미를 즐기는 것이 외롭기도 하다. 비록 내가 둥굴둥굴 어울려 한소리를 내지 못하는 편협함이 있을지 모르지만 오늘 연주하는 교향악단의 악기들처럼 어느 한 부분 내 음색과 나만의 톤을 가지고 살고 싶다. 조화라는 것, 화음이라는 것도 그렇게 각자의 독특한 개성이 모여 서로 어울려야 좋은 하모니를 낼 것이다. 다 똑같은 음색을 가지곤 훌륭하고 아름다운 교향곡의 소릴 내지 못할 것이다. 지금 나는 어떤 악기의 소리가 날까?. 다소 뒤틀리고 불안하던 음자리를 찾아 조율하고 내면의 소릴 듣고 싶은 가을이다. 내 울림이 내가 사는 동안 시끄러운 불협화음이 아닌 한 생의 고마움을 찬미하는 노래이길 바란다. 비록 슬픈 노래를 부르며 때때로 혼자 울지만 한 번 뿐인 내 생은 얼마나 소중하고 아름다운 것인가. 깊어가는 가을의 들녘에서 조용히 내 안으로 울려퍼지는 음악을 들어본다.
2004.10.11일. 먼 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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