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해마다 여름이면 에어컨 바람을 견디다 못 해 탈이 난다
직선으로 받아치는 찬바람을 피해 겨울 잠바도 걸치고 하지만
이런저런 예민한 상황이 겹쳐 목감기가 오고 몸살로 번진지 보름이 되었다
매사에 빠르게 대처하지 못하고 대충 넘어가려다 일을 키우고 만다
으실대던 몸이 최악의 상태에 이르자 오한이 일어
퇴근하자 마자 솜이불을 뒤집어 쓰고 끙끙 앓았다
이상체질인지 감기를 앓으면 열이 안으로 들어 속이 부대낀다
게다가 병원서 처방받은 감기약을 먹고서 위장장애가 와
쓰린속을 안고 사나흘 찡그린 얼굴로 버티려다 견디지 못해
엊그젠 병원에 가서 위 내시경검사까지 하게 되었다
봄부터 자극이 심한 음식을 먹으면 속이 쓰리거나
공복시에도 위 상태가 안좋아 검사를 받아야지 하며
차일피일 미루었는데 결국 감기끝에 병원행이 되었다
일에 몰려 쉬지 못하고 바쁘단 핑계로 커진 병이
복날 몸살까지 겹쳐 된통 앓고 나니
한여름 기력이 쇠하고 입맛이 뚝 떨어졌다
식욕은 살아있음의 징표일텐데 식욕이 떨어지자
만사가 귀찮고 힘들고 의욕이 없어져 버려 엄살만 늘었다
미열과 위에 염증이 생겨 탈이 났으니
뭘 먹어도 불편하고 눅진 장마처럼 기분이 꿀꿀하다
아무것도 먹고 싶지 않지만 속은 채워야 일을 하는지라
아침이면 누룽지에 시원한 오이지로 속을 달래며 며칠 버텼다
실파 송송 띄운 찬 오이지의 간간하고 슴슴한 맛이
열이 들어 더부룩한 위장을 달래며 입맛을 돋운다
요즘 얇게 저며 썬 짠지도 좋겠지만 짠지는 좀 텁텁하다
가끔은 몸이 아파봐야 나를 되돌아 보고 자신을 스스로 돌보게 된다
입맛은 고향이라고 했던가
입맛을 잃고 나니 유년의 고향이 그립다
이 복중엔 모깃불 펴 논 평상에 둘러 앉아
햇감자랑 찐 옥수수를 먹거나 강낭콩 숭숭 박힌 뜨거운 밀개떡을 먹곤 했다
들판엔 산딸기가 골짜기마다 빨갛게 익어가면 산나리꽃이 곱게 피었다
새삼 소박하고 구수한 옛날 먹거리가 그립다
아마 먹거리보다도 둘러앉아 나눠먹던 두레밥상의 추억이 그리운 건 아닐까
장마철에 숨어 자란 커다란 노각을 얇게 채썰어 살짝 절였다
커단 양푼에 고추장을 넣고 구수한 보리밥을 서걱서걱 비벼먹던 맛난 기억
감자밭 고랑이나 걸진 땅 어디서나 잘 자란 비름나물을 데쳐서
고추장이나 된장을 넣고 썩썩 비며 먹으면 코끝에 가득했던 비름나물의 향기
배앓이에도 좋아 나물을 보리밥 위에 뭉긋하니 쪄서 비벼 주셨던 어머님 손 맛
이제 다시 먹어도 그전처럼 맛을 느끼지 못하지만
입맛 잃은 요사이 고향을 그리듯 맛의 향수에 빠져 본다
입맛이 돌아오면 늘어진 기력도 회복될까
점점 시들어가는 의욕은 식욕과도 연결되어 있는 듯 하다
가난했다고 느끼던 그 시절이 풍성하고 행복했다는 말은 어불성설이겠지만
돌연 그 시절이 그립고 여름꽃처럼 아름답다
스트레스가 원인이라는 위염에 끼니때마다 약을 챙겨먹는 지금
뱃속보다 삶이 더부룩한 건 아닌지 모르겠다
모든 게 너무 넘쳐 소화하지 못하는 만성 소화불량의 시대에서
단지 입맛을 잃는 게 아니라 삶의 의미마져 음미하지 못한다면
풍요로운 이 시대가 결코 행복한 시간은 아닐 것이다
달맞이 꽃이 지천으로 피는 칠월의 달 밤
깜깜한 들길에서 가끔은 쏟아지는 여름별을 보고 싶다
북두칠성을 찾듯 잃어버린 추억들을 떠올려 비춰보고 싶다
2013년 7월 19일 먼 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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