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마음의 산그림자
내가 제일 좋아하는 계절도
나태주시인의 詩 "내가 사랑하는 계절"처럼 11월이다
구체적으로 입동을 지난 십일월 중순부터 십이월 초순정도의
늦가을을 지나는 쓸쓸하고 허허로운 초겨울이다
고추밭 고랑을 지나 빈 수숫대를 울리고 지나는 삭정이바람과
바싹 마른 밭두렁의 검불에 남아있는 구수한 건초냄새 맡으며
다시 빈 가슴으로 남은 황량한 들판을 느릿느릿 거닐다
떨어진 낟알같은 편린의 추억을 줍는 십일월이 좋다
추수 후 논바닥에 남겨진 벼포기의 그루터기가 점자처럼
끝없이 펼쳐진 원고지의 행간을 채워가면
나는 철새처럼 날아와 천천히 여름의 흔적을 읽는다
십일월은 비로소 앙상해진 자신의 뼈대를 만지며
푸르른날의 껍데기같은 허상의 그늘을 지우고
모두 다 떠나 보내고 남은 빈 존재의 흔적을 상기하거나
홀로 남겨진 내 모습의 실상을 확인하는 계절이다
내 가난한 상념들은 입동을 지나 밑동을 도려내고 남은
김장배추의 누런 떡잎처럼 버려져
뿌리가 뽑혀진 자리에서 흠뻑 무서리를 맞는다
어지러히 남겨진 가을의 잔해들 위에 하얗게 서리가 내리고
십일월의 대지는 날카로운 서릿발에 살얼음처럼 얼어 발이 시리다
우리가 살아온 길도 항상 서릿발처럼
위태로운 각을 세우고 있었는지 모른다
수북히 낙엽이 쌓인 초겨울 길을 한발짝 내 디딜적마다
바스락거리는 낙엽소리에 내가 놀라
누군가 하며 빈 하늘을 올려다 보면
마지막 잎새처럼 시나브로 낙엽이 진다
공허히 울리는 쓸쓸한 십일월의 날들이 지나면
이젠 흐린 하늘 멀리 곧 첫눈이 올거란 기별이 있겠지
인디언들은 11월을 모두 다 사라지진 않은 달이고
12월은 무소유의 달이라 했다
아직 모두 다 사라지지 않은 11월의 벌판에서
우린 무엇을 기억하고 무엇을 갈무리해야 하는 걸까
무소유의 달인 12월이 오기 전
응달진 십일월의 변두리에서 무엇을 버려야 할까
마음의 그물을 걸림없이 빠져 나가는 십일월의 바람앞에서
나는 얼마나 더 흔들려야 가벼워질까
2008.11월 18 일. 먼 숲
<사진 : 네이버 포토 솔개님의 갤러리에서>
<에필로그>
하룻밤 사이 기온이 급강하 해 아침이 겨울바람이다
목덜미가 추워 자라목이 된 채 종종거리는 아침, 어깨에 한기가 들고
삶의 체감 온도가 냉냉한 요즘인지라 첫 추위가 한파처럼 느껴진다
샛노랗던 길가의 은행나무와 프라타너스가 순식간에 옷을 벗어 알몸이 되었다
출근 길에 포도 위에 수북히 쌓인 낙엽을 밟으며
이별이 이렇게 찰나처럼 오는 것에 대한 비애를 삼키지만 이젠 슬프지 않다
초겨울 오전 열시의 햇살은 찬바람처럼 명징하다
동그랗게 어깨를 움추리며 이제사 겨울이 온 것을 피부로 느낀다
무심히 낙엽진 창 밖을 내다보니 가을이 저물고 있다
또 한 해가 저물어 가는 서운함을 빛나는 초겨울 햇살 속에 숨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