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이 읽는 詩

벚꽃 그늘에 앉아 보렴 / 이 기 철

먼 숲 2008. 4. 15. 11:17

 

 

 

 

 

 

 

 

 

 

  

 

 

벚꽃 그늘에 앉아 보렴

 

 

                           이 기 철

 

 

벚꽃 그늘 아래 잠시 생애를 벗어 놓아 보렴

입던 옷 신던 신발 벗어 놓고

누구의 아비 누구의 남편도 벗어 놓고

햇살처럼 쨍쨍한 맨 몸으로 앉아 보렴

직업도 이름도 벗어 놓고

본적도 주소도 벗어 놓고

구름처럼 하이얗게 벚꽃 그늘에 앉아 보렴

그러면 늘 무겁고 불편한 오늘과

저당잡힌 내일이 새의 날개처럼 가벼워지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벚꽃 그늘 아래 한 며칠

두근거리는 생애를 벗어 놓아 보렴

그리움도 서러움도 벗어 놓고

사랑도 미움도 벗어 놓고

바람처럼 잘 씻긴 알몸으로 앉아 보렴

더 걸어야 닿는 집도

더 부서져야 완성되는 하루도

늘 가볍기만 한 적금통장도 벗어 놓고

벚꽃 그늘처럼 청정하게 앉아 보렴

 

그러면 용서할 것도 용서받을 것도 없는 우리 삶

벌떼 잉잉거리는 벚꽃처럼

넉넉하고 싱싱해 짐을 알 것이다

그래, 흐린 삶이 노래처럼 즐거워지길 원하거든

이미 벚꽃 스친 바람의 노래가 된

벚꽃 그늘로 오렴

 

 

 

 

 

 

 

■ 며칠 새 꽃구름처럼 핀 벚꽃이 후루루 후루루 지고

잔설처럼 꽃잎이 날린다

길 건너 바라 본 산빛이 그 새 싱그런 녹빛이다

빈 산이 초록으로 물들면서 숲으로 변한다

순식간에 봄은 풀빛으로 변하며 사월을 지나가는데

나는 아직도 긴 꽃터널속에 있다

정체된 행렬속에 갇혀 빠져 나오지 못하고 있다

환각처럼 꽃그늘에서 머물고 있는 것이다

꽃은 바깥에서 피고 지는데 그동안 내 안이 소란스러웠다

마음에 봄 꽃 하나 피우지 못하고 시끄러웠다

자전거를 타고 둑방길을 가다 바람에 실려 온 꽃향기에 멈췄다

하얗게 핀 조팝나무 꽃무더기에서 번져 온 꽃향기다

알 수 없는 서러움처럼 꽃향기가 은은해 눈물날 지경이다

가눌 수 없는 봄과의 이별앞에서 시집을 펼친다

바람이 시를 읽어 나가는 사이

 행간 가득 점자처럼 쌓이는 꽃잎을 읽으며 나를 찾는다

서성거리는 그의 새치머리에 벚꽃이 잔설처럼 쌓였다

 

 

2008.4.15 일   먼    숲