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이 읽는 詩

처마아래 / 이 정 록

먼 숲 2008. 3. 7. 15:17

 

 

 

 

 

 

 

 

 

 

 

 

                                                                                                         

                                                                                                <사진: 블러그 진잘래산천에서>

 

                                

 

 

처마아래

 

 

 

이 정 록


                                                              

제비가 다녀갔습니다
제비알 작은 무늬들이 다녀갔습니다
새끼제비들의 빨간 입천장이 다녀갔습니다
화상연고 같던 새끼제비의 똥구멍이 다녀갔습니다
어미부리에 잡혀온 벌레들은 힘찬 날갯짓이 되어 돌아갔습니다
처마 밑 제비집을 바라보던
노부부의 눈길은 남아 있습니다
처마 아래 두 접 마늘처럼 바싹 말랐습니다
대처 아파트 베란다로 알 굵은 일곱 접이 떠나고
잔챙이 두 접만 남아있습니다
양파 다섯 접 중 세 접도 함께 트렁크에 실렸습니다
옥수수와 마늘이 다녀간 자리에 메주와 곶감이 처마를 당기고 있습니다
곶감도 곰팡이 슨 것만 남아 틀니 어루만지는 겨울밤입니다
쌀독 홍시도 떠났습니다. 메주는 뒤뜰 항아리 속으로 거처를 옮겼습니다
녀석들도 나중에 어둔 항아리를 벗어나 휘황한 도시로 갈 겁니다
산토끼 쓸개와 익모초와 씨앗망태만 남았습니다
이것만은 지켜야 한다고 창끝을 세운 고드름들이
겨우내 수정빗장 걸어주었습니다
양철치맛단의 올이 자꾸만 풀립니다
처마 그림자가 못 꼬챙이 많은 기둥을 톱질합니다
텃밭 마늘 싹이 창끝을 흉내 내며 솟아오르는 봄입니다
고드름처럼 녹아버리지 말자고 아린 독 품습니다
다시 제비 돌아왔습니다. 제비꼬리며 날갯죽지도
대장간을 다녀왔는지 날카롭게 빛납니다



        (시선) 2007 겨울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