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하는 나무 / 양 태 숙
■ 나무에 대해 애정을 갖게 된 것은 강하면서도 부드러운 그들의 모습 때문이라고 해야겠다. 땅에 뿌리를 내리고 하늘 또는 우주를 지향하는 나무는 동물의 삶과는 사뭇 다른 모습으로 보인다. 인간의 우주를 향한 열망 또한 자연 속에서 가장 기본 위치에 있는 나무의 생각과 닮아 있지 않을까? 신화 속에서의 나무라는 존재는 땅과 하늘을 연결하는 신적인 존재로 여겨졌다. 그리고 돌, 바위는 나무와 가장 가까이 있는 짝으로서 조화를 이루고 있음을 우리 전래문화에서도 자주 보았다.
♠ 내가 쉬고 싶을 때 나무는 가장 편안함으로 주었으며 그 안에서 정화됨을 느꼈다. 또한 인간의 횡포에 상처받은 나무는 스스로를 치유할 뿐더러 용서하고 베푸는 순수한 생명이기도 하다.
♠ 고독한 모습으로 때로는 초월한 모습으로 항상 우리 곁에 있어주는 나무에 대한 경외감으로 화면을 채웠지만 그 아름다운 존재를 표현하기가 벅차 차라리 한그루의 생각하는 나무이고 싶었다.
- 양 태 숙 - 아마 어린 시절을 보낸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런 비슷한 그림들을 그려봤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이 화가의 회화적 전략에는 초현실주의자들이 즐겼던 심리학적 기술이 깔려있다. 위에서 말했듯이 그의 그림은 복잡하지 않은 이야기와 화려하지 않은 색채들로 구성된 풍경들이라고 했는데 사실은 그의 그림엔 이야기가 없다. 아니, 이야기를 엮을 수 없는 이야기들이 있다. 또 화려하지 않은 색채들로 구성됐다고 했는데 사실은 사유의 빛으로 찬연하다. 또 의식의 지시에 따라 구름과 나무를 임의적으로 뒤바꾼다고 했는데 사실은 무의식의 지시를 받아 의식적으로 꾸며낸 풍경들이다. 그는 그의(우리들의) 마음 밑바닥에 흐르는 동경의 세계로 건너간다.
그의 그림이 우리에게(그에게도) 편안하게 보이고 일종의 안식처 같은 구석이 보여 진다면, 그래서 우리(모두)가 행복한 공간으로 인도된다면, 우리 마음의 밑바닥을 치는 통쾌한 기쁨이 깔려있다면, 우리는 평소 우리가 바라는 본연(무의식)의 우리를 보는 것이다. 그리고 본연의 우리 마음을 그림으로 표현하는 그의 방식은 절제된 구성과 계산된 질서의 코드, 의식과 무의식의 막을 관통하는 이성의 방식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반면, 그의 ‘생각하는 나무’는 이 사회의 정치, 이념, 권력들의 문제들이 배제된 세상으로 문을 연다. 그리고 우리들 내면에서 잔잔히 흐르는 깊은 무의식의 속삭임을 듣는다. 그의 그림은 그런 해맑은 마음의 노래와도 같다. 그의 그림에서 지저귀는 새의 노래를 볼 것이다.
양태숙_생각하는 나무-구름2_캔버스에 유채_53×45.5cm_2002
45.5cm X 37.9cm, 재질 : 유채, 땅
40.9cm X 31.8cm, 재질 : 유채, 강물처럼
53.0cm X 45.5cm, 재질 : 유채, 새
116.7cm X 91.0cm, 재질 : 유채, 꽃잎
72.7cm X 60.6cm, 재질 : 유채, 꽃
■ 양태숙의 『 생각하는 나무』전에 부쳐 <평론가 윤익영>
그 풍경은 우리에게 익숙하고 친근하기까지 한 즐거운 나라로 느낄 것이다.그의 풍경들이 친근해 보이고 즐겁게 느껴지기까지하는 이유는 나지막하고 작은 기와집 때문일 것이다. 그가 그린 집은 한적하고 평온한 언덕이나 숲에 있는데(꿈에서나 그려본 옛 고향 땅의 한 무대처럼) 왠지 세속과 동떨어져 보인다. 지금은 사라졌지만 분명 달콤했고 낙원 같았던 땅, 솜사탕같이 행복하게 녹아드는 동심(童心)의 공간 언저리에, 조작된 기억들로 재편집된 (그야말로) 그림 같은 집을 그리고 있다.
72.7cm X 60.6cm, 재질 : 유채, 구름따라
60.6cm X 50.0cm, 재질 : 유채, 비
72.7cm X 60.6cm, 재질 : 유채, 길
40.9cm X 31.8cm,재질 : 유채, 구름따라
116.8cm X 91.0cm, 재질 : 유채, 그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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