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끝의 여백

생각으로부터의 자유 / 르네 마그리트

먼 숲 2007. 3. 2. 09:54

 

 

 

 

근한 이월초의 어느날이였다. 철야작업을 한 피곤한 몸이라 쉬어야 하는데도 그 노곤함보다는 겨울내내 얼어있던 긴장감이 해동되는 듯 밖을 나서고픈 설레임으로 밀려온다. 쌓인 피로를 풀어야 하는 데 그보단 마음의 허기가 더 몸살나게 할 것 같은 날이라 무작정 늦은 아침을 나섰다. 모처럼 나 혼자 있을 수 있는 여가의 시간을 빠져 나와 도심속을 들어선다. 몇 년 새 낯익던 도심의 한 복판이 갑작스런 나들이에 낯설고 황폐해 보이는 건 날마다 변두리만 돌다보니 바쁜 삶에 허덕이고 지쳐있는 모습에만 익숙해 있어선가 보다. 서울 시립 미술관으로 향하는 한적한 길가엔 르네 마그리트의 전시를 알리는 홍보용 깃발이 축제처럼 펄럭이고 고궁을 낀 고풍스런 돌담길은 유서깊은 유럽의 거리처럼 정겹다. 얼마 전 어느 지인이 적극 권유한 마그리트의 전시 관람을 꼭 보고 싶어 하던 차라 오늘 나 홀로 호젓한 길을 나섰다. 가족과 함께 가고 싶었지만 좀 커진 아이들이 그의 그림을 생소하게 생각하기도 하고 이젠 자신들이 가고픈 곳을 원하는지라 강제관람 요청을 포기했다. 3년전인가 우연히 최영미 시인의 책에서 본 르네 마그리트의 그림에 반해 나는 그 즉시 인터넷을 검색하여 마그리트라는 화가의 존재와 그림을 알게 되었고 곧바로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그런 그의 그림을 볼 수 있으리라곤 생각도 못했기에 미술관을 들어서는 마음이 흥분되었다.

 

술관 이삼층을 전시한 많은 그림과 그에 대한 여러 자료들은 흥미롭고 마그리트의 그림들은 신비로웠다. 가끔 인사동이나 드나들면서 그림 구경을 했지, 이런 커다란 기획 전시는 아주 오랜만에 보는 셈이다. 오래 전 유럽 여행길에 들른 어마어마한 미술관 전시를 본 후엔 우리나라의 서양미술에 대한 전시가 초라할거란 시건방진 선입견이 앞서고 또 꼭 가고픈 충동을 느끼지 못했지만 이 번 마그리트의 전시는 참 알차고 새로운 것을 보고 공부할 수 있는 좋은 전시라 생각하게 했다. 초현실주의라는 쉽게 접하지 못한 우리의 정서에서 그의 그림은 많은 의문점과 공감키 어려운 감정의 느낌이 복잡할 수 있지만 그의 그림을 보고 느끼는 건  관람자의 몫일거라는 생각과 사고의 자유가 더 폭 넓게 그려질 수 있을 것 같았다. 세상의 모든 답들은 어찌보면 고정관념에 부응한 부산물일 뿐 진정한 답이라 정의 할 수 있는 게 무엇일까. 사람의 죽고 사는 단순한 명제조차 그 경계를 설명할 수 없는 문제에서 마그리트의 그림들은 안과 밖이란 경계를 허물고 우리의 사고를 한없이 확장시키고 시공을 초월할 수 있는 문제를 제시하는 듯 하다.

 

음 그의 그림을 본 후로부터 지금껏 알 수 없는 마그리트 그림에 대한 이미지들이 지금 천천히 그림을 관람하면서도 풀 수 없는 수수께끼처럼 느껴진다. 그리고 꿈이나 환상, 공상같은 보이지 않는 정신세계를  분석하고 해체하여 펼쳐놓은 듯한 마그리트 그림의 세계를 보는 것은 미로같은 꿈속을 걷는 듯 했다. 그러한 마그리트만의 그림세계에 들어가 미에 대한 논제를 해석하고 정의하는 것은 내 생각의 흐름에 맞추거나 기존의 고정된 틀에 짜맞추어 그림을 해석하려는 모순된 의도에서 생겨나는 것이라 생각되었고 그런 모순은 오히려 자유로운 사고로부터 벗어나지 못하고 사고의 자유를 파괴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마그리트의 그림속의 살아있는 오브제들은 보고있노라면 내가 몰랐던 플라톤의 이데아론을 생각케 한다.플라톤은 『 아름다운 사물들은 그것들의 다양성 속에서도 모든 미의 근원인 미의 이데아를 지향한다는 것을 말하고 싶어했다. 그러나 이 미의 이데아는 단순한 개념이 아니라 객관적인 실재(實在)를 갖는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미의 이데아는 모든 아름다운 대상과 같이 생멸하는 실재성이 아니라 움직이며 변화하는 사물들과 별도의 존재성을 갖고 있는 항구적 실재다 』 나는 그의 철학을 잘 모르지만 그림을 보며 언뜻 사물에 존재하는 미에 대한 플라톤의 이론을 긍정해 본다.

 

천히 거리를 두고 그의 그림과 어록을 보면서 마그리트가 추구했던 그림이 어떤 것이였는지 어렴풋 상상해보기도 한다. 그리고 내 삶을 살아가는 동안 늘 현실의 어느 한 공간이 허전하고 텅 빈 것 같았던 것은 마그리트의 그림같은, 알 수 없는 상상의 세계 일부분이 내 영혼의 세계를 지배했던 것은 아닐까 생각해 본다. 그림을 감상하면서도 그의 그림에서 오브제로 쓰였던 방울,구름, 새,바게트빵, 운석, 사과 등, 여러 이미지들의 의미가 무엇을 뜻하는지 마치 복잡한 함수처럼 어렵고 풀리지 않는 의문의 기호로 남아 있었지만 그 걸 알려고 하는 내 생각 또한 모순인 거 같다. 우리의 생각은 공유할 수 있는 것도 많지만 서로 공유할 수 없는 개인적인 사고영역의 범위가 보이지 않게 더 크고 무한하지 않을까. 그런데도 자유로운 사고를 자신의 주관에만 맞추어 생각한다면 서로간에 충돌과 논쟁과 파괴를 불러오는 오류를 범하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붙여진 그림의 제목과 그의 그림을 보면 제목에서는 내가 이해하고 유추해 낼 수 없는 마그리트만의 알 수 없는 세계와 충돌하곤 한다. 그가 무엇을 말하는가 란 문제의 제기보단 그냥 내가 보이는대로 생각하고 느끼는 게 더 넓은 사고의 세계를 상상을 하게 되는 것 같다. 어설프지만 그게 초현실주의는 그림이 아닌지 억지 대답을 하고 돌아 나오는 미술관의 이층 로비가 공중에 떠 있는 듯 여유롭다. 넓고 고풍스런 미술관 유리창으로 내다 보이는 덕수궁의 옛 전각들이 갑자기 초현실주의라는 마그리트의 그림과 대비되어 낯설게 보여지지만 응달진 서쪽 건너 해밝은 마당엔 약동의  봄볓이 그득하다. 아직도 머릿속엔 마그리트의 그림처럼 파란 하늘 가득 하얀 구름과 말방울 소리가 쟁쟁한데 말이다. 공상의 세계는 저 창밖에도 존재하고 있을 것 같다.

 

2007.3.1일.  먼    숲

 

 

■ 마그리트 그림 아래 그의 어록을 옮겨 보았다. 개인에 따라 생각이 다르기에 그의 그림처럼 이해할 수 없는 말도 많지만 마그리트의 그림을 감상하는 데 도움이 될 것 같았다. 그림과 어록은 마그리트 전시 홈피에서 옮겨왔다. 그리고 제가 삼년 전에 올렸던 마그리트에 대한 글을 다시 아래 옮겨 보면서 그의 다른 그림들을 감상해 봅니다.

 

 

 

 보이지 않는 선수, 1927 캔버스에 유채 ,152 x 195cm

    

 

검은 마술, 1927 ,캔버스에 유채 ,80 x 60cm

 

 

보물섬, 1942~43, 캔버스에 유채 , 60 x 81cm  

   

 

기억, 1948,종이에 과슈 ,60 x 50cm

 

 

 대화의 기술, 1950, 캔버스에 유채, 65 x 81cm  

 

 

광활한 바다, 1951,캔버스에 유채 ,65 x 80cm

 

 

붉은모델, 1953 ,캔버스에 유채,38 x 46 cm

 

 

 신뢰, 1964-65 ,캔버스에 유채 ,41 x 33cm    

 

 

 백지, 1967 ,캔버스에 유채 ,54 x 65cm

 

 

진실의 추구, 1963, 캔버스에 유채 ,130 x 97cm

 

  

심금, 1960 , 캔버스에 유채 ,114 x 146cm 

 

 

음악의 순간, 1961,종이에 붙이기, 수채물감, 콩테 ,24.1 x 26cm  

 

 

 

 

■ 르네마그리트의 어록 중에서

 

 


▶ 나는 나의 과거를 싫어하고 다른 누구의 과거도 싫어한다. 나는 체념, 인내, 직업적 영웅주의, 의무적으로 느끼는 아름다운 감정을 혐오한다. 나는 또한 장식미술, 민속학, 광고, 발표하는 목소리, 공기 역학, 보이스카우트, 방충제 냄새, 순간의 사건, 술 취한 사람들도 싫어한다.      


▶나는 냉소적인 유머와 주근깨, 여자들의 긴 머리와 무릎, 자유롭게 뛰노는 어린이들의 웃음, 골목을 뛰어다니는 어린 소녀들을 좋아한다.     


▶어떤 초상화는 그의 모델을 닮으려고 노력하지만, 우리는 모델이 그 초상화와 닮기를 바란다.     


▶나는 고대 혹은 현대 미술과의 단절을 선언한다.     


▶나에게 있어 회화는 색채를 병렬하는 예술이며, 이런 방식을 통해 색채는 실제적인 면을 상실하고 대신 영감을 받은 사유를 드러내게 한다.     


▶나는 보이는 것이 보이지 않는 것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하지 않고 그 역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보이지 않는 것의 형체를 그리려 하는 것은 너무 순진하고 어리석은 것이기 때문에 보이는 것만을 그린다.     


▶ 나의 회화에는 상징이 존재하지 않는다.  상징은 시의 신비한 현실에 집착하기 위한 것이며 전통에 매우 충실한 생각에 속한다.     


▶초현실주의는 우리가 꿈을 꾸면서 가졌던 것과 유사한 자유를 실제 삶에서도 요구한다.     


▶내가 생각하기에는 그림에 가장 적절한 제목은 시적인 것이다.  우리가 그림을 감상하면서 느끼는 다소 생생한 감정에 비교될 수 있는 제목을 의미하는 것이다. 시적인 제목은 우리에게 뭔가를 가르치려고 하지 않고 우리를 놀라게 하거나 마법에 빠져 들게 한다.   

 
▶말은 이미지가 보여줄 수 있는 것, 그것을 표현할 수 있다. 언어가 말할 수 있는 것, 그것은 이미지가 보여줄 수 없다. 그러나 그려진 이미지가 보여주는 것과 말로써 표현되어지는 것은 같은 것이다.  

   

▶나는 영화예술의 기초를 이해하고 있지만  회화를 통해서만 나의 생각들을 표현 할 수 있다.   

  
▶나무테이블의 다리들이 숲을 지배하는 것처럼 보였다면 그들에게 순수한 존재를 잃어  버린 것이다.     


▶ 나는 우리의 멋진 말들의 목에 매달린 쇠 방울들이 구렁텅이의 가에 있는 위험한 식물처럼 자라난다고 믿는 것을 더 좋아한다.     


▶여인의 나체를 하늘로 변화시키는 것은 마술의 행위이다.     


▶구와 집은 나무에게 불가사의한 방법들을 제안한다. 커튼은 쓸모없는 것을 감춘다     


▶<붉은 모델> 덕분에 우리는 인간의 발과 가죽구두의 결합이 현실에서 기이한 관습을 드러나게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르네 마그리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