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행착오 속에 깨닫는 아이 교육
큰애가 노오란 병아리 같은 초등학교 입학생활에서 이름표를 떼고 걸음마를 혼자 할 무렵이었나 보다. 오후 늦게 아내한테서 전화가 왔다. 큰애한테 무슨 일이 있었다고 귀뜸을 해 주는 전화였다. 수화기를 내려놓는 마음이 싸하니 마음이 시리다. 벌써 우리 생각을 앞질러 아이들은 커가고 있구나 하는 마음 뒤로 우리가 잘 못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퇴근 때까지 무겁게 마음을 짓누르게 했다.
전화 내용은 대충 이러 했다. 연년생인 자매는 오후에 둘이서 피아노 학원을 쌍둥이처럼 다닌다. 우리가 보기엔 서로 다른 얼굴인데 보는 이마다 쌍둥이냐고 묻고서 다시 쳐다보는 자매다. 그런데 학원을 갔다 온 두 애의 손에 못 보던 껌이 쥐어져 있었나 보다. 이상해서 엄마가 출처를 추궁하자 동생이 그 사건을 거짓없이 토해냈다. "언니가 사 준거야" 하는 동생의 말에 "언니가 돈이 어디 있어서 껌을 사니?" 하는 말에 큰애는 잘못을 빌며 사실을 고백했다고 한다.
일년을 먼저 다닌 언니는 피아노 학원에서도 친구가 많은 편인가 보다. 피아노 교습이 끝나면 버스를 같이 타고 올 친구들을 기다리는 자투리 시간이 얼마정도 있어 아이들은 게임을 하거나 가까운 슈퍼로 몇몇이 몰려가 군것질을 해왔던 모양이다. 그러다 보니 친구가 가끔씩 사탕이나 껌을 사 주고 얻어먹는 처지가 되어 미안했던 것 같았다. 그래서 큰애는 얘기도 없이 저금통에서 돈을 몰래 꺼내다 모처럼 친구들에게 선심을 보였는데 어린 마음에 그 일이 잘못한 것 같아 산 껌을 먹지도 못하고 가지고 온 모양이었다.

그 얘기를 듣는 순간 쇠뭉치로 뒤통수를 맞은 것처럼 멍하니 아프기만 했다. 큰애에게 미안한 것 같고 우린 너무 그 애들의 마음을 모르고 우리 고정관념으로만 생각해 어린애로 품고만 살았구나 하는 생각으로 아이가 잘못했다는 사실보다 헤아리지 못한 미안함이 더 컸다. 그 애들도 다른 아이들처럼 호기심도 있고 갖고싶은 것도 많고 마음대로 하고싶은 것도 많은데 너무 우리 의지대로 하길 원하고 그 애들이 부족한 것이 없는 줄 알았다. 그동안 친구와 슈퍼에 갈 적마다 얼마나 사보고 싶었던 것이 많았을까. 그 애라고 특별한 아이도 아닌데 그 생각이 컷을 거란 생각에 가슴이 콱 막히는 것은 자식에게 무조건 뒤떨어지게 해주고 싶지 않은 어리석은 부모마음인가 보다.
당연히 군것질거리는 값싼 할인마트에서 사다 떨어지지 않게 하면 알아서 먹고, 엄마의 취향과 아이의 성격에 맞춰 옷을 사주면 그 옷이 예쁠 거란 생각을 했는데, 아이는 어느새 자기 나름대로의 욕구와 내면의 표현력을 키워오고 있었던 것이다. 엄마도 황당해 하면서도 이실직고하는 그 애의 고백에 따듯하게 품어주며 다음엔 항상 네가 사고 싶은 것이 있거나 오늘처럼 친구들에게 미안해 사주고 싶으면 돈을 달라고 이야기하되 아직 큰돈은 쓰지 말라고 타이른 모양이다.
퇴근 후 집에 가니 큰애는 미안한지 죄의식을 느끼고 쭈뼛쭈뼛 서 있었다. 가만히 안아주며 오늘은 잘못했지만 네가 많이 컷 구나. 다음엔 가끔 너희들이 사 먹고 싶은 것 있으면 엄마아빠한테 말하고 네가 가서 직접 골라서 사라고 하니까 고개를 끄덕인다. 가끔 슈퍼에 같이 갈 때면 원하는 것을 사주기는 했지만 따로 돈을 주진 않았다. 말은 못했지만 혼자 가게서 물건을 사고 싶었던 모양이다. 그 날의 일로 갑자기 아이가 커버린 듯 느껴지고 한편 대견하고 뿌듯하면서도 허전한 것은 왜일까. 그 후 그 앤 문방구에 가서 필요한 준비물도 사고 가끔은 같이 슈퍼에 가서 그 애들이 원하는 아기자기하고 조잡하면서도 유혹적인 이상한 먹거리를 사 주곤 하지만 이제 곧 용돈을 달라하고 자기네 마음대로 하길 원할 것이다.

여직껏 시장이나 거리를 다녀도 자기가 사고싶은 것을 사 달라고 떼 부리거나 조르지 않고 잘 참고 욕심부리지 않았던 아이들이라 그런 줄만 알았었는데 그동안 그 애들이 남들과 비교해 많이 사고픈 충동을 참았을 거란 생각이 들자 공연히 마음이 아려져온다. 장난감이든 인형이든지 아이들도 선전 속에 나오는 새로운 모델에 마음을 뺏기면서 갖고싶어 했지만 꼭 필요한 것 외엔 사치스러운 것은 사 주지 않았다. 그것은 너무 큰 낭비이기도 전에 한 번 사주면 연달아 조르는 버릇을 키워주지 않으려 해서다.
비슷한 일이 또 한번 있었다. 학교에서 어느 정도 낯이 익은 후 제법 친구들 전화도 오고 서로 놀러 다니게 되었다. 요즘 아이들은 일 학년이래도 무슨 할 일이 그리 많은지 무조건 놀릴 수 없게 바쁘다. 모처럼 짬을 내서 친구 집에 놀러 간 모양이다. 그 날도 큰애는 혹처럼 동생을 데리고 간다. 자매는 항상 싸우고 시샘부리면서도 둘이서 친구처럼 붙어 다닌다. 집에 돌아 올 때는 여러 가지 스티커와 조그만 악세사리. 그리고 이것저것 주전부리를 가지고 왔다. 받아 온 아이들도 겁이 나 있는 채로 그 친구의 일을 이야기하며 상황 설명을 했다고 한다.
그 친구는 맞벌이 부모님이라 혼자 학원을 왔다갔다하며 아주 여유 있게 생활하는 친구인 것 같았다. 빈집에 들어가서 같이 놀다가 심심한지 그 친구는 꽤나 많은 돈을 가지고 슈퍼에 간 것 같다. 아마 만원은 된 모양이다. 용돈으로 준 것인지 저금하라고 준 것인지는 모르지만 그 친구는 우리 아이들에게 셈 할 수 없는 큰돈으로 자기가 사고픈 것을 다 사고 같이 놀아준 보답처럼 아이들에게도 산 것을 나눠주자 큰애는 놀라서 친구에게 그렇게 마음대로 큰돈을 쓰면 괜찮으냐고 하면서 걱정했다고 했다. 마지못해 받아오긴 했지만 옳은 일은 아닌 것 같다 하는 아이들의 말에 할 수 없이 될 수 있으면 다음엔 그 친구 집에 아무도 없으면 놀러가지 말거나 데리고 와 집에서 같이 놀라고 했다고 한다.

그런 일로 맞벌이하는 분들에겐 미안한 생각이지만 엄마에게 간섭받는 우리 애들과 여러 가지로 조심스럽고 다른 점이 많아 아직 쉽게 놀러 가는 것을 허락하는 것이 망설여지게 한다. 혼자 있는 아이들이 독립적이고 자율적이겠지만 엄마의 통제 속에 사는 아이들에겐 자유스러움이 익숙하지 않고 의타적인 면이 클 수도 있다. 그런 면에서 엄마의 통제는 자립심을 늦추겠지만 어차피 우리 애들도 커가면서 간섭에서 벗어나 자기주장을 내세울 것이니 아직은 엄마 품속에서 더 많은 사랑을 느끼게 하고 싶다. 때론 과잉보호가 아닌가 생각도 해 보고 너무 틀에 맞춰 통제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을 바꿔보지만 아이들은 엄마의 사랑이 그 어떤 물질적 풍요로움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하며 다소 아이들에게 자유를 주진 않았다고 해도 엄마의 사랑을 더 좋아 할 거란 생각으로 잔소리를 하다보니 벌써 모녀의 목소리가 커지는 경우가 많아진다.
일련의 사건에서 보듯이 아이들이나 부모의 자녀교육은 잦은 시행착오를 거듭하면서 커 가는가 보다. 결국 어떤 것이 현명한 이치라고 하고 맞추기엔 모두 오답이 나올 수 있는 문제인 것 같다. 학교 교육이야 정책적인 틀에 맞추다 보니 개개인의 인성을 모두 맞출 수 없다지만 가정교육 또한 어떤 것이 바른 正道인지 알 수 없고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도 아님을 느끼면서 아이들 성장의 흐름에 기대고 만다.
자라면서 인위적인 환경도 중요하지만 천성적인 자식의 인성을 느끼게 한다. 어릴 때는 잘 모르지만 자라면서 결국 부모의 과거사를 돌이켜 보게 하고 어쩌면 저 아이들이 또 다른 나일 수 있다는 생각에 아이의 생각과 인성을 조심스럽게 짚어보게 한다. 그러므로 천성을 쉽게 무시하면 안 된다고 다짐하면서도 저 아이는 나와 닮은 단점은 안 된다는 생각에 오히려 아이의 생각과는 무관하게 타고난 천성을 바꾸려는 부모의 강제성이 보이지 않게 비집고 나오는 것 같다.

<사진 네이버 포토 히로님 갤러리에서>
내 자식은 남과 다르게 키우고 싶다는 부모들의 욕심은 큰 것 같다. 핵가족화에서 요즘은 맞벌이 가정으로 변화하는 시대이다. 하나 둘의 자식을 키우다 보니 모두 똑같이 그 자식에게 모든 사랑과 기대를 쏟아놓고 더구나 혼자인 아이들에 대한 부모의 사랑은 더 각별할 수도 있다. 물질적이든 정신적이든 넘칠 정도로 풍족하게 받고 자라나는 세대라 부족함을 모르는 경향이 크다. 그러다 보니 모두 이기적이고 양보심이나 협동심이 부족하고 서로 배려하는 마음이 없어 보인다. 그래서인지 어린아이들의 학교생활에 왕따나 폭력적인 기질이 사라지지 않고 오히려 자라나고 있는 듯 하다.
어느 시대나 선과 악은 동반적인 관계로 있어 왔지만 요즘은 어린아이의 나쁜 점을 지적하거나 고쳐주려는 바른 마음이 사라지고 있다. 내 자식이 남을 괴롭히는 것은 내가 당하지 않으니까 상대방의 괴로움과 상처는 생각지 않고 방관하거나 방임하고 있다. 더구나 아직도 남아선호 사상의 그림자가 부모에게도 뿌리깊게 남아있어 아들의 기를 죽이지 않으려고 키워주려 하다보니 어린아이인 경우엔 보이지 않게 여아에 대한 괴롭힘에 죄의식마저 느끼지 않는다. 사회전반에 걸친 건전치 못한 힘이라는 존재가 학교에까지 뻗치고 있다고 봐야 한다.
남을 존중하고 남에게 피해주지 않는 민주적이고 도덕적인 인성교육이 학교 이전에 가정에서 키워져야 하는데 오히려 과잉적인 사랑이 그런 폐해를 낳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다 봐야 할 것 같다. 보이지 않게 스스로 아이들이 변하고 있다. 좀 더 이성적이고 바람직하게 변하는 것 보다 거칠고 반항적이고 이기적으로 변하는 느낌이다. 그것은 어린아이들 사이에서도 점점 심화되는 경쟁과 독선적이고 폭력적인 친구들에 대한 방어적인 반응이 그렇게 변하게 한다고 보아야한다.
말하자면 모범적이거나 약하고 착한 사람은 반대편이 시기와 경쟁과 따돌림으로 대하다 보니 그런 공격에 대한 방어는 자연 개인적이고 비협조적이고 거칠어지고 있는 것 같다. 지금 다소 개인적으로 긍정적인 것 보다 부정적으로 이야기하는지 모르지만 한창 뛰어 놀고 우정과 협동심을 기르며 자라야 할 아이들이 보이지 않게 병들어 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고 곰곰이 돌이켜 볼 문제인 것 같다. 모두 나만 살면 된다는 이기심으로 약하고 힘없는 아이들이 커다란 상처를 받거나 어둔 그늘 속에서 버림받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아야 할 것이다.
2000.12.11일. 먼 숲.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