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 숲에서 오솔길까지

가을의 문지방을 넘는 햇바람

먼 숲 2007. 1. 26. 13:55

 

 

 

 

 

 

 

              가을의 문지방을 넘는 햇바람

 

 



              복중에도 어머닌 빨간 고추를 방안 가득 발디딜 틈없이
              사나흘 널어 말리며 붉은 빛의 숨을 죽이더니
              햇발이 고운 아침부터 꾸둑꾸둑해진 고추를 반씩 쪼개어 
              나란히 멍석과 채반마다 널어 말립니다.
              그렇게 마당 가득 가을을 널어 놓으시더니

              이번엔 햇바람에 금쪽같은 참깨가 우수수 떨어질세라
              참깨송아리가 벌기전에 부지런히 베어서 비닐을 깔고

              참깨 한톨도 헛투루 잃어버리지 않으려고
              참새처럼 부지런하게 깻단을 옮겨 놓습니다.

              그 뿐 아닙니다.
              조밭엔 키를 넘는 조들이 주렁주렁 이삭을 달고 고갤 숙여
              난 새떼와의 전쟁을 선포하며 조밭에 새그물을 치느라
              하룻새에 벌겋게 몸을 그슬리며 서걱거리는 조밭속에서
              가을의 향기를 느껴봅니다.

              늦되어 순만 무성하게 친 콩밭을 지나면
              손바닥만한 들깻잎의 그 향긋하고 진한 고소함이 진동해
              옆에만 가도 삼겹살 냄새에 침이 꼴깍 넘어갑니다. 
              들녁에서 풍겨오는 달디단 풀냄새가 풍성한 가을을 예고합니다.

 

 

 

 



           말복을 지난 오이,수박,참외등 여름 채소는
           그 생명줄을 놓고 시들시들 수분이 말라가며 
           앙상한 뼈대를 들어내놓고 덩그라니 누우런 노각과
           윤기없는 열매를 매달고 말라가고 있습니다.

           그 위로 장대같은 수수밭의 수숫대는 꽃송이같은 
           붉은 이삭을 달고 서서히 고개의 각도를 꺾고 있습니다.
           여름내 꼿꼿이 머릴 들고 치솟던 푸른 열정들이
           아침저녁 찬바람에 조금씩 고갤 조아리고 가을을 향해 인사를 합니다. 
           어느 한순간 거역하는 법이 없이
           자연의 순리는 계절의 흐름속에 흘러갑니다.

           이젠 인생의 계절을 느낍니다.
           삶의 철학이 따로 있습니까.
           그 어떤 훌륭한 위인이나 유명한 사상가일지라도
           이 자연의 순리를 거슬러 오를까요.
           잠시 바람부는 틈 새로 들녘을 나서 보세요.
           가을의 전령사인 풀벌레 노래소리 따라 가을의 향기를 느껴보세요.

           우리의 가을이 오고 있음을 직감합니다.
           인생의 계절이 바뀜을 주름지는 피부에서 느껴지지 않나요.


           2000.8.22일. 가을의 문턱에서 추억의 오솔길.

 

 

 

 

 

                             

                                                <사진: 네이버 포토갤러리 curiodskim님>

 

 

 

        ■ 벌써 이 글을 쓴지 오년이 넘었다. 그 때의 가을처럼  어머님의 누런 조밭도,

           서걱대는 수수밭도 없어지고 이젠 작은 주말 농장 텃밭에서 가을을 가꾼다.

           그래도 아직 향기짙은 들깨밭 고랑도 있고 가을 애호박이 윤기나게 열리고 있다.

           김장을 심은 둔덕엔 소롯하게 무, 배추도 싹을 틔웠으니

           이미 가을을 경작하고 있는 셈이다.

           햇수로 몇년이 지났지만 옛글을 다시 읽으니 사는 게 시시하기도 하다.

           그러나 산뜻한 햇바람처럼 올가을을 맞이하고 싶다.

 

           어제 아는 지인의 블러그에 이런 독백이 있어 옮겨 본다.

       『 살기 힘들다 말해버리면 내 삶이 유치해진다.

           그러므로 나는 그런 말들을 마른 밥 삼키듯 꿀꺽 삼킨다 』

           지금 내 심정도 그렇다.

           다들 내 또래들은 나름대로의 젖은 맘으로 저무는 나이의 문지방을 넘었을 것이다.

           올드해지기보단 심플해지고 싶다.

           하여 젖은 맘들은 초가을의 바지랑대에 하얗게 널어 말리고 싶다.

           코스모스처럼 바람에 하늘거리는 것도 좋겠다.

 

 

 

           2006.8.22일.   먼    숲

 

 

 

             더위가 물러난다는 처서(處暑)입니다
             오늘 태양은 황경(黃經) 150도에서 15도 사이를 지나갈 것입니다
             옛사람들은 오늘이 오면 여름장마에 눅눅해진 옷과 책을 말렸습니다
             들녘에는 벼가 익기 시작하는 날입니다
             예로부터 처서는 천지가 쓸쓸해지는 시기라고 합니다
             쓸쓸하다는 것은 스스로를 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쓸쓸하지 않는 사람은 누군가를 사랑할 수 없는 것입니다
             나도 쓸쓸할 때마다 그대를 생각합니다
             쓸쓸하기에 그대를 향한 그리움이 익어 가는 것입니다
             저 팔월 포도밭의 포도알처럼 익어 가는 것입니다
             하늘과 땅과 우주가 쓸쓸해지기 시작하는 날입니다
             우주의 쓸쓸함 속에서 작은 포도알 하나 같은 나도 쓸쓸해집니다
             쓸쓸하기에 내 그리움의 포도밭의 포도는 익어 가는 것입니다 그대

 

 

            ■ 정일근의 "시인의 편지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