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 숲 2007. 1. 26. 08:32
 
 
 

 

 

 

 

 

 

 

 

 

 

영화  "나라야마부시코"의 겨울

 

 

☆★☆ 시놉시스 ☆★☆

 


백년전, 한 마을에 전설이 있었다.
일흔이 되면 나라야마의 꼭대기에서 삶을 마감해야 한다는...

겨울은 고통의 계절이다.
척박한 토양에서 거둬들인 미약한 수확물로는 그들에게 겨울은 굶주림의 계절이기 때문이다.
겨우내 태어난 사내 아이들은 이웃의 논바닥에 버려지며 여자 아기는 한줌의 소금에 팔린다.
남의 음식을 훔치는 건 가장 큰 죄이다. 그 가족은 산채로 매장된다.
그리고 70세의 노인은 나라야마 산으로 떠나야 한다. 살아있는 사람들에게 짐이 되지 않기 위해.

봄.
69세인 오린은 나라야마에 가기 위한 준비를 한다.
만나는 사람들마다 그녀는 이번 겨울에 나라야마에 갈 것임을 즐거운 얼굴로 알린다.
그런 어머니를 쓸쓸한 눈으로 바라보는 오린의 맏아들 다츠헤이.
30년 전 자신의 아버지는 할머니를 버리지 않으려고 마을을 떠났고 그런 아버지를 평생 원망했지만
이제 아버지를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어머니는 아들을 다그친다.
"다츠헤이야. 넌 아버지처럼 겁쟁이가 되면 안된다. 너에게 식구들의 목숨이 걸린 것을
잊지마라."

여름.
다츠헤이가 새 아내를 맞게 된다.
착하고 부지런한 새 며느리는 어머니의 마음에 쏙 들지만 이제 그녀는 할 일이 없어졌다.
그녀는 자신이 죽을만큼 쇠약해졌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 스스로 돌절구에 자신의 이를 부딪쳐 깨버린다.
고통에 못이겨 찡그린 그녀의 얼굴은 온통 피투성이가 되지만 입가엔 희미한 미소가 감돈다.

 

 

 



가을.
날이 선선해질수록 다츠헤이의 마음은 괴롭다.
그러나 그 해 가을은 유난히 흉작이었다. 어머니를 붙잡기엔 양식이 턱없이 부족했다.

어머니는 아들에게 말한다.
"내일 새벽, 난 나라야마에 갈거다. 사람들을 불러다오."
그날 밤, 산에 가기 위한 행사가 이루어진다.
"산에 가실 때는 법을 꼭 지키셔야 합니다. 첫째, 산에 들어가면 아무 말도 하지 말 것.
아무도 모르게 새벽에 집을 떠날 것..."
천천히 주의사항이 말해질때마다 다츠헤이의 얼굴을 점점 더 어두워진다.

새벽.
어머니는 아들에게 업혀 산으로 간다.
험한 산기슭을 기를 쓰고 가는 다츠헤이.
금방이라도 눈물이 쏟아질 것 같은 붉어진 눈을 부릅뜨고 그는 정상으로 향한다.

바위에 채여 발톱이 빠지고, 비탈 아래로 미끄러지기도 하지만 그는 어머니를 내려놓지 않는다.
나라야마의 정상에서 삶을 마감한 노인에게는 천국이 기다린다는 전설.
그에겐 정상에 가는 것만이 어머니께 드릴 수 있는 마지막 마음이었다.

 

 

 

 
집에 돌아온 다츠헤이는 아들 케사키치의 노래를 듣는다.
"할머니는 운이 좋아. 눈이 오는 날에 나라야마에 갔다네"
그는 가족들을 돌아본다.
그들은 이미 어머니의 옷을 나눠 입고 있다.
그리고 마을은 눈으로 덮혀있다

 

◆ 영화정보 - 무비스트- 에서

 


<나라야마 부시코>는 1993년 제 36회 칸 영화제의 황금 종려상을 수상하며 이마무라 쇼헤이라는 이름을 세계 영화계에 알린 영화다. 이마무라 쇼헤이는 진솔하고 힘이 넘치는 하층민의 삶을 사실적으로 담아내며 일본 영화계에서 큰 자리매김을 한다. 오랜 옛날의 풍습이였다는 우리나라의 고려장처럼 살아남기 위해 노인을 죽여야 하는 '기로 전설'에서 생존을 위해 누군가의 생명이 담보가 되어야 하는 아이러니 속에 영화의 스토리는 시작된다. 그리고 누구나 마음 밑바닥에 가지고 있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슬픔이 등장인물의 삶을 훑어 나가는<나라야마 부시코>는 죽음에 이르는 길에 대한 영화가 아니라 태어난 것은 죽게 되고, 모인 것은 흩어지고, 높이 올라간 것은 아래로 떨어지는 삶의 진리. 삶의 길을 보여주는 영화다.

 

■ 사실은 영화 이야길 하려던 게 아니었다. 예전보단 춥지 않은 풍족한 겨울이지만 살수록 겨울의 깊이가 어둡고 길다. 겨울의 의미가 봄을 위한 휴면상태가 아닌 남루한 끝자락처럼 느껴짐은 왜일까?. 홀로 남겨진 외로운 이들의 겨울이 갑자기 나라야마로 가는 눈오는 날처럼 고독하고 가난하게 느껴져 오래전 영화의 시놉시스를 들쳐 보았다. 먹을 것이 없어 동물적인 본능처럼 노인을 버려야 했던 옛날이 지금에 와서 대입될 문제가 아니지만 사는 게 감옥같을 지금 긴 겨울의 고독한 날들이 그 때보다 더 나을 게 있을까 하는 사회적 문제가 심심치 않게 눈에 보인다. 앞으로 이삽십년 후엔 다섯명중 한 사람이 노인일거란 통계에 우린 어찌 대처하고 준비하는지 생각해 볼 문제다. 핵가족으로 변모한 지금 당장 우리들이 부모가 먹을 게 없어서 보다 병들고 홀로 남겨진 외로움에 추운 겨울을 기울어져 가는 시골의 누옥에서 감옥같은 아파트의 공간에서 독거 노인이란 이름으로 갇혀 살고 있지 않은가. 어쩌면 노쇠한 목숨이란 이유로 수형자처럼 봄을 기다리기 보단 오히려 편안한 죽음을 바라는 또 다른 천국의 나라야마를 꿈꾸고 있지는 않을까.

 

 

 

 

 

영화속의 이별이 생이별처럼 가혹할지 모르나 사랑하는 자식의 품에서 등신불처럼 죽으려 저 세상으로 떠나는 영화속의 오린이 현재나 미래의 노인보다 불행하다고 단정 지을 수 있을까. 천정부지로 미친 듯 뛰어 오른 아파트를 받으려고 자식이 효도 각서를 쓴다는 이 삭막한 세상에서 어머닐 지게에 지고 산으로 떠나는 가슴아픈 아들에게 누가 돌을 던질 것인가. 나이들수록, 늙어 기력이 쇠해 갈 수록 내가 어느날 갑자기 쓰러져 자식에게 버림받는 무거운 짐이 되지 않기를 바라는 속마음을 누구나 감추고 살 것이다. 늙어 병드는 것이야 어쩔 수 없는 운명이라 해도 종내 사랑했던 사람들에게조차 버려져 홀로 남겨지는 게 더 두려울 것이라 생각한다. 아무리 든든한 보험이 있다 해도 가족이나 사랑하는 사람들과 같이 하는 따스한 정이 그만만 할까. 가난했어도 오손도손 모여 어려움을 같이 나누던 시절이 겨울이 깊어져 가니 불현듯 따끈한 아랫목처럼 그립다. 많은 식구가 같이 모여 체온을 나누고 살던 때가 더 없이 부자같고 행복했던 건 아닌지 되돌아 보는 계절이다. 요즘들어 아침 저녁으로 여기저기 거지처럼 떠도는 노숙자를 보는 게 싫다. 해마다 보는 모습이지만 그들의 초췌한 모습에서 겨울은 더 황량해져 간다. 겨울의 풍경은 사랑하는 사람들과 보듬고 사는 게 가장 아름다울 듯 싶다.

 

영화에서 "어머니! 눈이 와요"란 모자간의 대화로 이별을 고하는 순간 고단했던 인생의 한순간처럼 가볍게 눈은 흩날리고 쌓인다. 눈부처처럼 앉아 죽음을 맞이하는 오린의 고요한 모습에서 겨울은 죽음을 거두어 가지만 영혼은 필시 새봄처럼 새로운 생명으로 탄생하지 않을까 위로한다. 끝내 잘 가라는 이별의 말대신 어서 내려가라는 손짓으로 아들을 밀어내는 오린의 모습이 아름답다. 인생이 대단한 듯 목에 힘주고 살던 세월이 어느날 허망하게 보잘것 없는 미물의 생명처럼 죽음으로 세상과 이별한다는 초라한 사실 앞에서 나는 세상 영화가 부질없다는 걸 깨닫고 있는 걸까. 사람의 운명을 알 수 없으니 이다음 나도 누군가에게 외로움의 짐이 되지 않고 눈이 오는 날 나라야마로 떠나는 오린처럼 죽음의 의식이 명쾌할 수 없을까. 지금 앞을 돌아 볼 겨를 없이 바쁘게 매달려 살지만 이제는 한 생의 남겨진 겨울을 어떻게 따사롭고 다정하게 살 수 있을지 한번쯤 생각해 볼 일이다. 한 해가 저문다. 남은 겨울들이 동굴속처럼 어둡고 길지 않길  바란다. 죽음이라는 끝맺음을 꽃잎처럼, 흩날리는 흰 눈처럼 단아하고 가비얍게 종결지을 수 있도록 이별하는 세월도 연습하고 싶다.

 

축복처럼 눈이 오는 날 먼 설국의 나라야마(일본어론 고향산이라 한다)엔 꽃잎같은 영혼들이 소복소복 눈처럼 쌓이고 있을 것 같다. "어머니! 눈이 와요" "춥지 않지요".  다츠헤이는 자신도 돌아 갈  눈 오는 나라야마를 자꾸 뒤돌아 본다.

 

 

2006.12.20일.    먼    숲