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을 깨라
-나는 수없이 알을 깨도 나를 깨진 못했다- ㅋ
입학준비를 하기 위해 엊그제 저녁나절 집 가까이 있는 조금 큰 문방구를 들렀다. 문방구엔 새학기와 입학 준비를 하기 위한 푸릇한 청소년으로 가득찼고 그들은 진열된 다양한 팬시용품처럼 아름답고 싱그러워 보였다. 오래전의 단조롭던 학교앞 문방구와는 다르게 요즘엔 셀수 없을 만큼의 다양한 상품과 칼라풀하고 아름다운 디자인으로 매장안이 아기자기하다. 뿐만 아니라 문방구와 악세사리,가방에서 인형까지 많은 생활용품이 어우러진 잡화 백화점의 규모로 변해 있었다. 모든 상권이 이렇게 복합적이고 대형화된 할인마트로 변모하여 소비자의 취향에 만족감을 더해주는지 모르지만 언제부턴가 작은 가게들이 큰 상점에 밀려 궤멸되는 현상은 오랫동안 터줏대감 노릇을 하던 구멍가게 뿐만 아니라 이젠 우리 개개인의 삶도 그렇게 힘에 밀려 죽어가고 있는 것 같다. 어쩌다 이야기가 삼천포로 빠지지만 어제부터 아침 저녁 출근길은 어디에 불평 하나 못하고 지옥철속에서 맥없이 시달려야 했다.
매번 반복되는 일이지만 철도노조의 파업은 가장 힘없고 가난한 서민을 볼모로 한 힘겨루기는 아닌지 모르겠다. 아둥바둥 대중교통에 매달리는 많은 서민이 나라 기간산업의 경영까지 알 수 있는 여유가 없어 누가 잘못인지 모르지만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툭하면 교통마비를 일으키는 파업은 자신들의 정당성을 주장한다 해도 욕 먹을 수 밖에 없다. 냉냉한 추위에 떨며 기다린지 한시간만에 온 전철을 겨우 비집고 들어가 서 있었지만 작은 요동에도 파도처럼 휘말리며 압사의 위험을 느껴야 했고 마치 육이오 피난열차의 아비규환 장면같아 비싼 요금 내고 열차를 타고도 그 안에 갇힌 내가 치욕스러웠다. 근래 자주 일어나는 정신착란적인 방화나 자살소동과 각종 범죄도 이러한 작은 것의 소외와 힘의 불균형에서 오는 불만들이 원인이 될거라 생각하니 단순한 사회 문제가 아닌듯 싶다. 반대로 거대한 자본주의와 단체화된 집단은 순리가 아닌 힘의 논리로 지배하려 하며 철옹성처럼 자신들의 이익만 지키는 병폐로 자라고 있는 것 같다.
이야기는 다시 호흡을 가다듬고 제자리로 돌아 간다. 아이들이 문구를 고르는 사이 난 뒷짐지고 그리 크지 않은 매장구경을 했다. 물건의 실용성엔 옛날보다 나아진 것은 없는데 모양과 색, 디자인의 변화는 저절로 구매욕을 느끼게 할만큼 세련되고 보기 좋아졌다. 이렇게 다양해진 상품들처럼 앞으로 비좁은 사회의 틈바구니에서 저 아이들도 잘 팔리는 상품으로 만들어져야 하는 현실이 부모로서 말 할 수 없는 부담을 느낀다. 좋은 인성과 본래의 모양보단 치장되고 잘 포장된 메이커성 결과만이 우수성을 인정받고 구매욕을 느끼는 훌륭한 사람으로의 상품가치를 지니는 요즘이니 점점 과열된 교육열과 이기주의 적인 편애로 학생이나 학부모 모두 치열하게 경쟁해야 하는 숨막히고 삭막한 세상이 될 수 밖에 없다. 가끔 아이에게 이런 세상의 형편을 설명하며 경쟁사회의 필연성을 부추겨 남보다 앞서 가야함을 종용하기엔 나 자신도 너무 힘없고 작은 아비임에 부끄러움을 느낀다.
필기구와 노트 코너의 북적이는 반대편엔 미술도구들이 화사하게 자리잡고 있다. 그 좁은 틈을 들어가니 일곱빛깔 무지개 같은 색지와 물감들이 현란하다. 오래전 해외에서 이러한 대형 문구점에 들렀다가 수십가지의 칼라풀한 색지와 물감들이 겹겹으로 쌓인 미술용품 코너에서 떠나질 못한 적이 있었다. 늘 흰 스케치북과 스무개도 안되는 단순한 포스터 칼라만 써 봤던 나는 수십가지 칼라의 색연필이나 파스텔, 수채화 물감과 화려한 색 켄트지를 보자 무언가 그리고 만들고 싶은 욕망이 솟아 올라 충동적으로 마음에 드는 고운 색지를 고르고 오십색이 넘는 색연필을 샀다. 언제 무엇을 그릴지도 모른 채 사와 서는 책상 서랍에 넣어두고 얼마전까지도 곱게 묵혀 두었다. 아마도 그 때엔 마음속에 떠 오르는 무지개를 산 것 같다. 무엇을 그리는 것 보단 늘 무엇을 그리고픈 그리움같은 꿈을 사들고 와서 그 꿈이 그려지길 소원했던 것 같다.
지금 열네살 소녀는 문방구에서 알록달록한 노트를 고르며 어떤 꿈을 그리고 있을까. 비록 벌써부터 하루를 몽땅 학교와 학원을 오가며 공부에 목숨을 거는 현실에 염증을 느끼면서도 한 눈 팔지 않고 자라고 있지만 그 애도 좋아하는 연예인에 관심을 가지고 새로운 유행을 알게 모르게 조율하며 자신의 고집도 키우는 평범한 아이다. 나도 한 때 무지개 꿈을 꿀 나이에 자주 절망하면서 일찌감치 혼자 체념을 배웠지만 오히려 그러한 깨어지는 아픔이 표현할 수 없는 몽상같은 꿈이 되어 그리움처럼 더 커져만 갔었다. 지금 내 아이에게 오래된 그 시절의 나를 설명 할 필요는 없지만 그래도 이 건조한 학교생활 속에서도 무지개빛 꿈빛깔을 잃지 않고 자랐으면 하는 바램이다. 커가면서 점점 예민해지고 부모의 잔소리에 대한 대응이 톡톡 튀어 오르고 있지만 벌써부터 공부에 매달려야 하는 그 애가 안스럽다.
마음같아선 세상이란 무한한 흰 여백의 캔버스에 네 마음대로 네가 원하는 그림을 그리고 좋아하는 화려한 색을 칠하라 하고 싶지만 난 내 부모가 나를 키운 것처럼 마음 뿐이지 꿈을 그릴만한 하늘을 내어 주지 못한다. 그러면서도 내가 못했던 것, 내가 채우지 못했던 욕망과 부와 명예등 세상의 통속적인 성공을 버리지 못하고 그 애에게 대물림하려고 무언의 압력을 행사하고 있는지 모른다. 이러한 바램이 부모의 욕심이 아니라 너의 행복을 위해서란 변명으로 오만한 권력을 휘두르며 이제 막 잎을 피우는 아이의 연약한 가질 쥐고 흔드는지 모른다. 부모에게 태업과 파업을 모르고 잘 달려 주길 바라는 일방적인 요구만 하면서 그 애의 고충을 난 모르는 척 할 지도 모른다. 그리고 다시 반복적으로 주입시키겠지. " 애비처럼 힘있는 세력에 속하지 못하면 세상살이가 힘들다. 언제 밀려 압사 할 지 모른다. 그러니 너를 위해선 좋은 직장과 너만의 힘있는 일을 할 수 있는 능력을 키워야 한다" 고 속된 욕심을 얘기할 것이다.
그러나 사랑한다. 내 아이들아. 미래는 무한하지만 알 수가 없구나. 비록 삶이 신기루 같다 해도 네 꿈은 네가 이루어야 하는 네 몫이다. 혹여 숨겨진 애비의 못난 욕심을 헤아렸다 해도 그 바램에 얽매이지 말고 다만 올곧은 나무처럼 바르고 아름답게 자라다오. 너의 푸른 꿈을 안고 먼 바다를 향한 갈매기처럼 힘찬 날개짓을 멈추지 말아다오. 알을 깨라. 그리고 해마다 네 안에서 부화하는 꿈의 새를 넓은 미지의 세계를 향해 날려 보내라.
2006.3.3일. 먼 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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