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로 가는 길목
아침길을 나서면 먼저 주위의 산과 나무에 눈길을 준다. 하룻 밤 사이에도 꽃봉우리 벌고 꽃이 피듯 단풍빛이 꽃잎처럼 곱고 아름답게 짙어지며 제 각각 눈부신 색깔로 변해 있어 자연스레 반가운 눈인사를 하게 된다. 아파트 앞 화단에 달린 모과는 첫서리 오자마자 벌써 누군가에 의해 노란 향기 익기도 전에 사라져 갔고 지금은 단감이 드문드문 꽃등처럼 주홍빛을 달구고 있다. 프라타너스 터널길의 무성함은 여전하지만 수그런진 녹색으로 서늘하던 그늘이 부드러워졌고 귀풍스럽던 느티나무길은 오색찬란하다. 늦거나 빠른 개화시기의 꽃길같이 느티나무의 단풍은 녹두빛에서 노랑으로 노랑에서 갈색으로 비슷한 색의 채도가 자연스런 혼합색으로 섞여저 가을이란 캔버스에 화려하고 따스한 만추의 풍경을 색칠하고 있다.
시월이 저무는 가을의 출근길은 그처럼 단풍을 보느라 정신이 없다. 버스에 올라 모처럼 도서관에서 빌려 온 책을 펼쳤다. 게으른 탓도 있겠지만 몇 년전부터 책을 읽을 여유가 없는 바쁜 일상이라 가끔 도서관에서 빌려 온 책 한 두권은 제대로 읽지도 못하고 반납하면서도 바람이 산산한 봄과 가을엔 손에 책을 들고 싶어져 욕심처럼 빌려오곤 한다. 먼저 휴일에 도서관 서가에 꽂인 "동물의 겨울나기" 란 제목에 끌려 집어 든 책은 다 읽기엔 엄두도 나지 않게 두껍고 활자가 빽빽하였다. 이렇게 두껍고 무거운 책은 대개 몇 페이지씩 읽다가 날마다 단잠에 빠져 종착지까지 가는 가끔은 좋은 수면제의 약효로 끝나지만 그래도 겨울이 가까워지는 철이라 "겨울나기"란 제목이 마음에 끌려 책을 펼치니 중간에 끼워진 메모지가 낯익다.
다시 몇 페이지 읽다가 지겨워 목차를 따라 책의 중간을 들춰 보니까 내가 아는 지인의 명함이 꽂혀 있다. 책갈피로 끼워진 반가운 이름을 알고나서야 내가 작년에도 이 책을 빌려 왔던 것이 어렴풋 기억이 났다. 그 때도 조금 뒤적거리다 상세한 관찰기록의 글이라 사설이 긴 이 책을 반도 못 읽고 반납했던 것 같았다. 그만큼 건성으로 들쳐 보다가 포기한 탓도 있다 해도 이렇게 일년도 안되어 그 사이의 기억이 하얀 망각으로 사라졌다는 사실이 서글퍼지기도 했다. 아마도 올해도 눈이 시리게 빽빽한 저 책의 활자를 다 읽지 못하고 말 것이다. 책을 고를 땐 나의 겨울나기는 어떻게 준비해야 하나 하는 마음으로 집어 들었건만 나는 미련하게 책을 읽기보다는 책을 베고서 동면에 들어버리고 만다.
일요일 아침 늦은 시각에 가까운 동산에 올랐는데도 아직 주위는 한강에서 밀려 온 안개로 섬처럼 고립되어 있었다. 햇살이 두꺼운 안개에 막혀 가려져 있다가 늦게서야 투명한 빛을 발산한다. 가을볕에 드러나는 숲의 속살은 가볍고 건조하지만 향기롭다. 지금은 울긋불긋 물든 벚나무의 구멍난 잎들이 가장 아름답다. 낮은 산자락을 휘감은 활엽수의 숲은 서서히 옷을 벗기 시작한다. 그들의 겨울나기가 시작된 셈이다. 오월이면 눈처럼 꽃잎이 쌓이던 운동기구가 있는 산 중간 공터의 아카시아 숲엔 꽃잎대신 까만 씨앗이 발에 밟혀 퍼져 나가고 있고 산마루의 비탈엔 억새가 하얀 은발을 바람에 날리며 멀리 한 생의 씨앗을 퍼뜨리며 한 해살이를 마감하고 있다. 도토리 나무가 있는 오솔길엔 청설모가 갈무리를 위해 부지런히 곡예를 하고 하나의 숲을 이루던 모든 개체들이 저마다 겨울나기를 위한 마무리에 분주해 있었다.
낙엽냄새가 물씬 풍겨오는 오솔길을 따라 산길을 오르락 내리락 하노라니 숲의 끝자락에 닿아 나는 잠시 벤취에 앉아 볕바라길 한다. 좁은 소로 옆에 늘어진 산국의 향기도 말라가고 멀리 바라보이는 벌판은 추수가 끝나 휭한 가슴을 드러내고 있다. 십일월이면 서리내린 저 농로를 따라 마냥 빈 뜰을 걷고 싶어지는 풍경이다. 내 겨울나기는 그렇게 황량해지는 추위로 부터 시작되었다. 긴 겨울을 나기 위해 식량을 비축하는 작은 동물들도 많고 겨울잠을 자려고 여름내내 지방을 비축하며 둔하게 비곗살을 찌우는 동물도 있다. 애벌레가 되어 일찌감치 땅 속에서 환생을 준비하는 생물도 있고 고치를 틀고 몸을 숨기고 또 다른 생을 기다리는 곤충도 있다. 철새들은 겨울나기를 위해 목숨을 걸고 먼 대륙을 건너 이동을 하고 많은 동물들이 겨울이 오기전에 번식을 하는 지혜로 나름대로의 분주한 계절을 살고 있지만 살수록 사람의 겨울나기는 왜 이리 황량해지는 걸까?
길 끝이라 인적이 드물어서일까 작은 새들이 낮은 산자락에 모여있다. 머리까만 박새부터 곤줄박이, 콩새, 멧비둘기등 이름모를 새들이 나뭇가지를 오르 내리며 종잘댄다. 그 새들도 겨울을 나려고 통통이 살을 불렸고 목둘레는 기름진 솜털이 따스해 보이고 날개에 윤기가 흐른다. 모처럼 휴일이 되어 느리게 조용히 걷는 발걸음에서야 나는 새들을 만나게 되었다. 참 오랜만에 새들을 가까이서 본다. 어찌 저리 날렵하고 오목조목하니 이쁠까! 가만이 들여다 보니 신비롭기만 한데 그 새들은 금새 포르릉하니 날아 오른다. 아마도 그 곳에 새들이 많은 것은 지대가 낮고 습해 벌레가 많고 늙어 말라가는 리기다 소나무가 있어 죽은 껍질속에 먹이감이 많은 모양이다. 새는 뾰족한 부리로 바지런히 먹이를 쪼아대며 파란 하늘을 날아 다닌다. 저 작은 미물들은 사람보다도 더 현명하게 겨울나기를 하고 있었다.
우리의 한 생도 그러한 겨울나기일까? 지금의 나이를 살고 나니 남아있는 시간들이 겨울같다. 어찌 살아내야지 가난하지 않고 배고프지 않고 아프고 힘들지 않은 윤택한 생활을 할 수 있을까 하는 욕심과 본능의 걱정들이 점점 커진다. 어린날의 삶은 늘 겨울이 춥고 배고팠다. 부실한 겨우살이를 견디고 나면 부스럼처럼 버즘먹은 봄이 오고 다시 곤궁한 가을을 맞이했다. 지금은 적어도 춥고 배고픈 근심은 없는 겨울을 나는데도 겨울을 맞이하기 전엔 마음이 허하고 춥다. 비축해야 할 식량과 땔감이 곳간에 쟁여져 있어도 마음이 텅 빈 것 같은 황량함은 한 때 그렇게 살아 온 습성이라 하기엔 서글프고 배부른 소리같다. 아마도 빈 몸으로 온 생이 다시 가진 것 없는 빈 몸으로 내어주려니 허탈한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스산한 상념의 눈을 들고 하늘을 보니 철새들의 비행이 힘차다. 편대를 지어 날으는 철새들이 남쪽으로 향했다,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일까? 따라가고 싶다. 새처럼...
2005.11.1일 먼 숲.
<사진 : 김선규 기자 갤러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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