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미꽃 당신
어머니! 이제 할미꽃의 전설을 다시 씁니다.
제 어린날엔 할미꽃이 그저 꼬부라진 할미의 꽃인줄만 알았습니다. 잔디갓에서 놀다 모습도 모르는 할미의 소릴 들으려 꽃을 따서 귀에 대면 에밀레종처럼 에밀레! 에밀레! 하고 푸른 종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둥근 종처럼 봉긋한 무덤가에 지천으로 피어난 꽃들은 긴 겨울을 지나고 나면 에밀레! 에밀레! 하며 핏빛 울음처럼 피어났습니다. 마른잔디가 푸릇해질때까지 머리 조아리며 무덤곁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그 때엔 전 제 어미가 지금처럼 등 굽은 노파가 되어 백발의 머리카락을 할미꽃처럼 날려 보낼 줄 몰랐습니다. 노랑 호장저고리에 붉은 깃을 단 새 색시가, 아침마다 칠흙같은 머릿결을 빗어내리던 여인이, 호호백발 할미가 될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 전 어머니의 어머니를 보지 못했습니다. 전 아버지의 어머니를 몰랐기 때문입니다. 척박한 땅에서 동토의 겨울을 나면서도 꼿꼿하게 버텨 온 어머니라는 이름의 허리가 한 순간 허무하게 구부러 들 줄 몰랐습니다. 자신을 버리고 구비구비 한 생의 고빗길을 넘어 오느라 힘없이 꼬부라진 걸 이제사 알았습니다. 세상이 당신의 마른 젖가슴처럼 가난한 줄도 이제사 알았습니다. 할미꽃이 꽃보다 어여쁜 당신의 자식을 낳느라 쏟아 낸 하혈의 흔적을 닮아 핏빛인 걸 이제사 알았습니다. 자식에게 늘 빛이 되고 등불이 되려고 오직 양지녘에 피면서 이른 봄을 전해주기 위하여 샛노란 심지의 초롱불을 밝힌다는 것도 늦게사 알았습니다. 어느 날 또 다시 우주처럼 둥굴게 핀 홀씨가 되어 미련없이 떠난다는 것도 이제사 알 것 같습니다. 당신이 누웠던 작은 자리, 늘 따슨 온기가 식지 않은 금잔디의 꽃밭이 당신이 다시 돌아 갈 자리라는 걸 인정치 않았지만 이젠 그 옆자리에 초막처럼 제가 꽃이 되어 피어 있어야 할 차례입니다. 그리고 살다가 종종 마음 아프면 옥도정기빛 당신의 꽃을 따서 가슴에 붙이면 꿈결처럼 나을 것 같다고 위무합니다. 이젠 당신의 아픔으로 사랑의 종을 울리지 마세요. 머지않아 당신의 둥근 젖가슴에 기대어 제가 종소리처럼 울겠습니다. 아니 제가 다시 당신의 자궁속으로 갈 때까지의 이야기 모았다가, 해마다 꽃이 피면 도란 도란 종소리처럼 들려 드리고 싶습니다. 어머니 이젠 할미꽃을 어여쁘신 당신의 꽃이라는 신화를 만들겠습니다. 세상 모든 어미를 그리는 사모곡이라 노래하겠습니다.
2005.3.28일. 먼 숲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