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혹을 훨씬 넘은 나이는 겨울을 느끼는 나이인가 봅니다. 그 때부터인가 아침 저녁으로 지나치는 여윈 겨울산에서 앙상한 쇄골만 남은 능선을 보게 됩니다. 젊은날엔 지나치면서 윤곽조차 보이지 않던 겨울산의 모습이 이젠 손금처럼 환하게 그 맥을 들여다 보게 합니다. 아마 겨울내내 긴 추위에도 동면하지 못하고 웅크린 채 찬바람을 맞고 있는 겨울산의 언 속살을 보지 못한 게 아니라 더운피가 흐르던 시절엔 겨울산의 의미를 느끼지 못해 막연히 산으로만 인식했을 겁니다. 그 시리고 허허한 고독으로 침묵하는 겨울산을 알지 못했겠지요.
그러나 지금은 바라볼적마다 내 안의 영혼은 회색의 흐린 하늘 아래서 어둔 늑골을 구부린 채 침묵의 언덕에서 먼 실핏줄까지 바람부는 산맥은 단절된 고독감에 굳어져갑니다. 짧은 해그림자마져 겨울산의 언 마음을 속속들이 녹여내지 못하고 고적한 마음의 언저리만 기웃대다 사라지고 매서운 삭풍에 잔가지까지 흔들리며 우는 속울음으로 지새운 아침은 드러나는 가슴마다 멍든 상처로 하얗게 수척해져 있었고 밤 새 불어친 찬바람으로 멈추지않는 잔기침에 창백해진 얼굴은 눈부신 햇살에 눈조차 뜨지 못했습니다.
때론 하얗게 휘어진 등뼈 아래로 가지런한 잔뼈들의 사이사이로 지나는 바람은 태고의 슬픈 전설처럼 들려와 시린 마음을 열고 귀 기울이게 됩니다. 그 소린 마치 사랑하는 사람이 죽으면 그 뼈를 깎아 그 그리움을 담아 불었다는 영혼으로 우는 슬픈 전설의 악기"케나"라는 피리와 애끓는 공명을 불어내는 팬풀루웃소리가 되어 안데스산맥 인디오들의 절절한 노래 같았습니다. 먼 고원으로부터 전해오는 아득한 그리움은 결빙의 골짜기에서 내 그리움의 산을 넘는 신경줄까지 전해지기엔 얼어버린 심장을 녹일 뜨거운 사랑의 언어조차 없어 산맥과 산맥을 잇는 전신주의 통신은 겨울잠을 자듯 그 맥박소리가 가늘었고 그런 순간마다 나는 내 속울음을 토해 내며 지친 바람소리에 숨어 울어야 했습니다.
해빙을 입맞춤 하기엔 봄은 아직 먼 마음의 끝에 있고 봄이 오기까지 겨울산은 밤마다 야윈 어깨를 들썩이며 줄이 끊긴 현악기처럼 간헐적인 신음으로 울고 있을 겁니다. 긴 겨울 문득 잠이 깨는 새벽 문풍지를 울리는 바람소리에 일어나 어둠속에 웅크린 겨울산을 보면 고행의 먼 길을 나선 수도자가 되어 굳은 가부좌를 틀고 앉아 속세를 휘돌고 온 바람소릴 잊어버리고 있었습니다. 묵상으로 깊어가는 골짜기를 따라 노을이 지면 겨울산의 나목은 검은 예복을 입은 수도사처럼 흔들림없이 줄 서서 낮은 음의 그레고리안 성가를 부르고 있었습니다.
산메아리조차 바람소리에 묻힌 겨울 한 복판에서...
2000.11.25일. 추억의 오솔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