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 숲 2007. 1. 26. 07:40

 

 
 
 

 

 

 

 

벌써 아파트 앞 벚나무는 피빛의 잎새로 곱게 단풍이 들어가고 있었다. 유난히 지쳤던 올 가을인지라 나는 단 하루라도 멀리 떠나 휴식의 긴 호흡을 하고 싶었다. 어느덧 시들어가는 세월이지만 내면은 더 뜨거운 감성의 마그마가 들끓고 있는 것 같았다. 하루가 한강을 따라 난지도를 지나쳐 삶에 지친 영등포 역을 경유하는 오고감의 반복이라 뜬금없이 이 정체됨에서 벗어나고픈 일탈의 하루를 꿈꾸며 좀 한가한 날 월차를 냈다. 먼 일탈을 계획하면서도 겨우 생활반경을 크게 벗어나지 않은 범위내에서 목적지를 정하고 아침나절 떠나려 하는데 아직도 아이들이 걸려 아내는 망설이고 있다. 결국 신문을 뒤적이던 난 편하게 영화를 보자는 제의를 했고 부지런히 조조영화를 보기위해 충무로행 전철을 탔다. 영화를 본지도 꽤 오래 되었다. 마니아는 못되어도 예전엔 좋은 영화를 보러 홀연히 혼자 영화관을 들렀는데 헐리우드 영화에 식상해 볼 영화도 별로 없지만 바쁜 일상에서 그런 여유는 점점 멀어져만 갔다. 오늘 문득 눈에 들어온 영화 포스터는 파리의 세느강이 배경으로 흐르고 있는<비포 선 셋>의 영화였다. 오래전 여행에서 본 파리를 추억하며 가을 파리지엔느의 마음으로 센치멘탈한 영화를 보고 싶었다.

 

<비포 선셋>은 <비포 선라이즈> 의 후편이다. 전편을 영화로  보고싶었지만 보지 못하고 오래 전 비디오로 비몽사몽간에 보느라 별로 남는 기억이 없다. 전편의 줄거리는 이렇다. 비엔나를 거쳐 파리로 향해 달리는 유럽횡단 기차 안. 여자친구를 만나러 유럽에 왔다가 실연의 상처만 안고 돌아가는 미국 청년 제시(에단 호크)와 부다페스트에 사는 할머니를 만나고 파리로 가는 셀린느(줄리 델피)는 처음 본 사이지만 교감이 깊어져 함께 비엔나에서 내리게 된다. 아름다운 비엔나 거리를 돌아다니며 사랑과 우정, 삶과 죽음에 대한 진지한 대화를 나누며 서로에게 이끌리는 두 사람은 하룻밤을 보내고 헤어진다. 그러나 서로 연락은 하지 않기로 한다. 행여나 둘의 관계가 상투적으로 될까봐 두려웠던 것이다. 이튿날 동트기 전, 14시간이란 짧은 시간에 찾아온 사랑을 인정하기 힘들었던 두 사람은 기차역 플랫폼에서 이것이 정말 사랑이라고 느낀다면 6개월 후, 이 장소 이 자리에서 다시 만나자는 약속을 뒤로 한 채 헤어진다. 그날 이후 9년,사랑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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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년 후,제시는 둘의 만남을 책으로 썼고 어느덧 베스트셀러 소설가가 된 제시는 출판 홍보 여행 중, 파리의 섹스피어 서점에서 우연히 셀린느를 만나면서 영화는 시작된다. 그러나 낭독회가 끝난 후 제시는 곧 뉴욕행 비행기를 타야 한다. 서먹했던 순간도 잠시 그날 저녁을 함께 보내면서  80분이라는 그 짧은 시간 속에서 두 사람은 삶과 사랑, 자신들의 변한 모습 등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며 비록 제시는 네살배기 아들을 둔 유부남으로, 셀린느는 자유로운 사랑을 원하면서 지금 다른 애인이 있지만 서로의 마음속에 아직도 9년 전 못지않은 깊은 교감이 살아있음을 발견한다. 그렇게 이들은 자신들의 인연을 다시 한번 되짚어 보는 짧은 재회의 순간이 이 영화의 전부다. 9년 전에 그렇게 헤어지지 않았으면 우린 어떻게 됐을까 하는 아쉬움으로 두 사람이 서로의 진심을 파악하기엔 함께 있을 수 있는 시간은 너무 짧았지만 이루워 질 수 없는 첫사랑의 모습에서 오랜 후 다시 만나 애인보단 친구가 되어 속내를 털어내면서도 애틋한 옛사랑의 추억을 회상하는 모습이 가을 단풍처럼 아름답게 물들어 온다.

 

영화는 해가 지기 전, 제시가 비행기를 타기 전까지의 정해진 짧은 시간의 공간안에서의 리얼리티한 대화와 표정이 전부이기에 아주 밋밋하고 싱거울 수 있다. 파리의 시내 몇 군데가 배경이고 두 배우의 연기에 의존하는 저예산 영화라 보면 된다. 그러기에 우리가 생각하는 느린 재회의 순간이 아닌 빠른 템포로 진행되어 오히려 이별후의 재회의 감정 또한 담백하고 심플하게 느껴진다. 그런 단순함을 채워주는 건 한시간 정도 쉬임없이 풀어내는 그들의 대화내용과 배우들의 훌륭한 표정 연기다. 9년이 지나선 그들이 재회후 서로가 어떻게 변했냐고 묻듯 젊고 신선하던 에단호크도 나타샤킨스키와 쥴리엣비노쉬의 앳된 모습을 섞은듯한 청순한 쥴리델피도 주름이 생기고 좀여위긴 했어도 성숙한 모습이다. 그러나 전편을 이은 두 사람의 재회라선지 정말 옛 애인들 사이처럼 그 눈빛과 표정이 자연스럽고 친숙하다. 숨 쉴틈 없이 쏟아내는 대화 또한 수다스러울만큼 빠르고 진지하다. 나이들어 부끄럼없이 터놓는 인생의 여러면과 살아가는 의미와 모습까지 결코 시시하게 지나치지 않게 짜임새 있는 대사의 진솔함이 거리를 빠르게 걷는 동안 같이 보폭을 맞춰 걷고 이야기하게 한다.

 

 

 

 

 

애로틱하고 로맨틱한 장면도 없이 파리의 뒷골목을 지나 카페에서, 세느강에서 그 녀의 집에까지 동행하면서도 비행기 시간에 맞춰 짧은 시간에 9년간 묻어 둔 사랑의 감정을 이야기 해야 하는 강박관념이 보는 사람도 짧은 재회를 아쉬워하게 된다. 그동안 쌓였던 서로에 대한 그리움을 감추며 지금 삶의 모습이 어떤지 그리고 행복한지를 물어가면서 가슴에 품었던 사랑을 확인해 가는 과정에서 우린 지난 과거의 아련한 추억여행을 떠난다. 헤어짐의 순간이 가까와오면서 그녀의 집에 들른 제시는 셀린느에게 그녀가 작곡한 노랠 청한다. 기타를 치면서 담담하게 부르는 그녀의 노랜 이미 식어버린 옛사랑의 추억보단 그 순간의 소중하고 아름다운 진실을 차분하고 밝게 노래한다. 셀린느의 노래를 들으며 제시는 다시금 그녀와의 사랑을 확인하며 아쉬워하고 셀린느 또한 비록 비껴간 인연이었지만 그 사랑이 진실이였음을 읽어가며 가볍게 춤을 춘다. 마치 가까운 친구와 수다를 떨듯이 자연스럽게 대화만 하다 떠나야 할 시간이 촉박해 오는 순간 영화는 끝나지만 구태여 결말을 생각지 않는 추억처럼 진행형으로 남는 영상도 오래 기억나지 않는 내면의 울림으로 다가온다.

 

<비포 선라이즈>가 사랑을 시작하는 연인들의 환상을 담은 영화였다면, <비포 선셋>은 사랑을 선택한 연인들의 현실을 담은 영화이다. 늦은 오후를 배경으로 리얼타임으로 진행되는 영화였기에 보는 사람도 떠나야 할 비행기 시간을 의식하며 초조함을 느낀다. 그만큼 마치 김수현작가의 대사처럼 템포가 빠르고 두 사람의 연기는 자연스럽다. 어느 먼 날 가깝던 친구를 우연히 만났을 때, 아니 내 주위의 많은 사람들의 겉으로 드러난 모습은 평온하고 행복해 보이지만 마음을 열고 들여다 보면 모두 살아 온 만큼의 다양한 사연이 숨겨져 있음을 안다. 보이지 않는 내면의 상처나 아픔도 있고 그 사람만의 행복도 존재한다. 결국 사는 모습은 모두가 달라도 그 삶의 차이는 그리 크지 않기에 위안을 얻을 수도 있다. 저무는 가을 내 마음의 허전함에 뒤돌아 보면서 허허로워하지만 인생이 살수록 종종거리는 발걸음으로 나름대로의 행복을 찾아가는 유순한 방랑자임을 확인하며 쓸쓸한 마음을 스스로 위무한다. 뜨겁던 사랑도 젊음도 지나고 나면 이 영화처럼 드라마틱하지도 않고 살아온 골목길을 뒤돌아 보는 저녁이 된다. 우린 해가 지기 전 어디론가 돌아가야 한다.

 

2004.10.25일. 먼   숲

 

 

 


 

■ 노래 : <영화 "비포 선 셋 " 에서 쥴리델피의 노래 >

 

 

A Waltz For A Night


 

왈츠 한 곡 들어봐요

그냥 문득 떠오른 노래

하룻밤 사랑의 노래

그날 그댄 나만의 남자였죠

꿈같은 사랑을 내게 줬죠

하지만 이제 그댄 멀리 떠나갔네

아득한 그대만의 섬으로

 

그대에겐 하룻밤 추억이겠죠

하지만 내겐 소중한 당신

남들이 뭐라든 그날의 사랑은 내 전부랍니다

다시 한번 돌아가고 싶어

그날 밤의 연인이 되고 싶어

어리석은 꿈일지라도

내겐 너무 소중한 당신

그런 사랑 처음이었죠

단 하룻밤의 사랑 나의 제시

그 누구와도 바꿀 수 없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