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묘 길
처서가 지난 구월의 문턱에서 여름의 끝자락이 보이던 주말에 멀리 벌초를 다녀왔다. 경기도 양평을 지나 삼사십분 산골을 돌아나가면 양동이란 마을이 있다. 중앙선이 지나는 작은 시골이지만 깊은 내륙에 들어앉아 있어 외지고 조용한 면 소재지인데 내가 사는 곳에서 차로 서너시간을 족히 걸리는 먼 거리다. 신도시에 밀려 조상들의 묘가 모두 그 낯선 타향으로 이사를 가서 양지바른 산자락에 서열 순으로 일렬로 종중 집안의 묘지를 구성해 놓았다. 조상의 뿌리 찾기도 해체되어가는 요즘 한 곳에 조상들의 묘를 모셔서 찾을적마다 새롭게 자신의 뿌리를 생각하게 되고 가족 구성간의 관계를 확인하게 되는 좋은 점도 있지만 먼 거리와 묘지 관리는 바쁜 현대인의 생활에서 일년의 한두번 성묘를 가는 것도 크나큰 부담이 되었다. 옛날엔 마을 앞뒷산에 산소가 있어 오가며 바라보았는데 이젠 먼 타향에 떨어져 있으니 소원해지기도 하고 쓸쓸한 느낌도 든다. 어쩌다 가는 성묘길도 그나마 휴일을 피해 새벽같이 서둘러야 길이 막히지 않아 여러 산소를 돌보고 해저녁에야 돌아 올 수 있었다.
올 봄엔 낮아진 봉분과 패여나간 잔디에 뗏밥을 주고 제초작업도 해야 한다고 이른 봄부터 노모는 성화셔서 한식이 가까운 날 월차 휴가를 내어 아직 동도 트지 않은 꼭두새벽에 출발을 서둘렀었다. 남한강을 따라가는 길은 여명속에 물안개가 자욱하게 몰려다녀 길가의 가로등에 의지해 간신히 더듬거리며 양평을 들어섰다. 한 치 앞을 볼 수 없는 길에서 겨우 양동으로 들어서는 이정표를 찾아 들어선 산길은 굽이굽이 고개를 돌적마다 안개속에서 화사한 봄꽃이 얼굴을 내밀고 연초록의 봄향기가 산의 능선을 넘고 있었다. 큰길을 벗어나 산소가 있는 마을 근처에 왔으나 낮은 골짜기엔 짙은 농무로 인해 길을 찾을 수가 없었다. 분명 그 마을이 맞는데 앞의 지형지물을 볼 수 없어 가까운 그 곳에서 벗어나 엉뚱한 마을에서 뱅뱅 돌고 있었다. 겨우 마을 사람을 만나 길을 찾아 들면서 한참동안 길을 잃고 헤매던 순간들이 마치 꿈을 꾸는 것 같았다. 짧은 한 생을 압축해 보는 것 같기도 하고 그 안개길이 우리가 떠나야 할 알 수 없는 길인 것 같기도 했다. 그렇게 잠시 안개속에서 보이지 않는 미혹의 세계에 갇혀 있었다.
숨이 가쁘게 산을 오르니 짙은 안개가 걷히고 산 아래 분지들이 아늑하게 눈에 들어 온다. 진달래가 흐드러지게 핀 산자락을 돌아 볼 여유도 없이 산소 대여섯 봉분에 새 황토를 파서 돋구고 벗겨진 잔디를 기우고 큰 잡풀을 매는 고된 일을 한 숨 쉬지 못하고 부지런히 마쳤다. 간단하게 제를 올리고서야 늦은 점심을 먹고 다시 서둘러 돌아와야지 어둡기 전에 집에 들어 올 수 있었으니 그 날은 꼼짝하기 힘들 정도로 중노동이였다. 지극정성으로 조상을 모시는 노모의 극썽스러움은 산소를 돌보는 일이 대충 할 수 없는 일인지라, 삽에 호미에 흙을 담을 부대까지 완전무장을 준비하시고 당신 허리보다 굽은 가파른 산길을 올라와 진두 지휘 하시는 통에 봄볕에 벌겋게 살이 익었지만 한동안 자주 오지 못했던 죄스러움을 조금 덜 수 있었다. 해마다 올해가 마지막인 심정으로 가시는 노모의 마음과는 달리 나는 오갈적마다 왜 이리 먼 곳에 조상을 모셨냐는 투덜거림을 모두 종중 어른들에게 돌리면서 앞으로 모실 어머님의 장례길이 아득함에 걱정과 짜증스러움이 다가드는 성묘길이 되고 만다. 어쩌다 막내인 내가 이런 걱정까지 떠맏고 있는지 억울한 생각마져 들기도 했다.
염천 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여름이 가고 가을의 문턱에서 다시 노모는 보채신다. 한식쯤에 돋은 봉분에 풀이 많이 났을 것이고 잔디는 죽지 않았는지 벌초를 하러 가자는 말씀에 이 번에 나도 궁금도 하여 선뜻 토요일에 가자고 약속을 하고 간단한 제수를 준비했다. 아이들이 아직 방학이라 남겨 두고 또 이른 새벽길을 나섰다. 이번엔 봄처럼 안개가 없어 힘들지 않게 이정표를 따라 쉽게 갈 수 있었다.젊으신 시절엔 큰 아들의 행로를 따라 또 자식들을 키우기 위해 봇짐장사를 하시느라 팔도강산 먼길을 많이도 다니셨던 분이 허리굽어지고 늙어진 후엔 오직 일에만 매달리고 갑갑하게 고향을 떠나지 않고 사셨다. 워낙 고집이 세신 분이라 자식에게도 기대지 않는 성미로 꿈쩍않는 분인데 그 먼 성묘길은 빠지지 않고 다니시니 참으로 효부다. 강을 따라 가는 중에 기분이 좋으신지 이런 저런 옛이야길 하시기도 하고 연신 저긴 어디쯤이냐고 예전과 다르게 변한 바깥 풍경에 궁금해 하신다. 어딜 모시고 간다해도 마다하시겠지만 비행기 타고 제주도 한 번 구경시켜 드리지 못하는 내 주변머리가 서글프기도 하다. 참 지독히 자식을 위해선 몸을 아끼지 않는 독한 어미이건만 난 항상 그러한 어미의 모성이 내 삶의 가장 큰 아픔이 되기도 했다.
백여개의 봉분이 나란하게 펼쳐진 묘지에 오르니 아침이 환하다. 증조부 산소부터 올라 보니 세상에!, 봄날 잔디밥을 준 위로 제비꽃이 빽빽하게 새 순을 내밀고 올라와 있다. 그럴 것을 걱정해 속에 흙을 파서 주었는데도 어디서 날아온 것인지 씨를 뿌린 듯 소복하게 돋아난 제비꽃밭이 되었다. 다행히 올 적에 양평시장을 둘러 호미를 몇자루 준비해 왔기에 망정이지 헛일을 할 뻔했다. 노모는 미리 알고 계셨는지 양평을 들어서자 호미를 사야한다고 성화셨다. 낫을 가는 사이 어머니와 누님,아내는 부지런히 제비꽃을 뽑아나기에 여념이 없었다. 잔디를 깎는 것보다 풀 매는 게 더 큰 일이 되었다. 연신 땀을 닦으시며 내가 벌초하는 산소마다 얘길 하신다. "이젠 내년엔 산소에 잡풀이 하나도 없게 해 주세요" "아이들도 벌어 먹기에 바쁜 세상입니다." "그러니 깨끗하게 하고 사세요" 하시면서 마치 마지막 당부처럼 하소연을 하신다. 조상님들도 그런 노모의 마음을 아셨으면 좋겠다. 점점 살기에 바쁘고 힘들다고 날 낳고 키운 조상들조차 모르는 척 지내는 요즘이니 이렇게 먼길을 오실때마다 어찌 그런 생각이 들지 않겠는가.
점심이 가깝도록 쉬지도 못하고 잡풀과 잔디를 깨끗하게 매고 다듬었다. 간단하게 제를 올리면서 나도 마음으로 조상님께 어머니와 같은 소원을 말씀드렸다.짐을 챙기는 사이 어머님은 먼저 하산하셨다. 지팡이를 짚고 아장아장 걸어가시던 어머님과 산 아래턱에서 만났다.산길가로 마타리, 뚝깔, 벌개미취, 잔대꽃등 이른 가을꽃이 정겹다. 물마른 도랑엔 자주빛 물봉선이 귀엽게 피여있었다, 물봉선을 보시곤 무슨 꽃이 그리 이쁘냐고 물으신다. 여전히 꽃이나 아름다운 자연을 보시면 감탄하시는 마음이 아이같으신 어머님의 손엔 어느새 작은 나무가지가 들려 있었다. "얘야, 이게 산초나무다. 나무향이 좋아" 하신다. 우리동네에선 보기 드문 산초나무가 그 산엔 많았다. 개울로 가서 손을 씻는데 물이 오염되지 않아 노란색, 자주색 물봉선이 지천이다. 수수이삭이 핀 밭고랑을 뒤로하고 양동 시내로 나왔다.
시장기를 달래려고 들어서는 시장 길목에 허름한 막국수집이 보인다.메밀을 눌러 만든 국수와 육수가 시원하고 구수하다.통 바깥 음식을 드시지 않아 노모와 외식을 거의 해보지 못한 마음 이 늘 아린데 그날은 참 달게 드신다. 아마도 시장터에 가게가 있어 옛 향수를 느낄 수 있는 편안함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잠시 들른 양동역엔 조롱박에, 하늘타리, 수세미, 화초호박과 가지가 주렁주렁 열려 매달아 놓고 있어 시골 간이역의 정취가 그윽하다. 나도 참 불효자다. 오십이 낼 모레거늘 젊은 날 혼자 세상 여러나라를 구경했으면서도 여직 어머님 모시고 한가로이 여행 한 번 못했다. 이젠 기력없어 갇혀 사셔도 푸른 자연과 시골장터같은 향수는 어머님도 여전히 좋아하시거늘 항상 내 생각만 해 왔다. 아마 어머님은 언제 이 길이 마지막 길이 될 지 몰라 낯설지 않으시려 힘겹게도 오시나 보다. 되돌아 가는 마음엔 어머님 내년에도 후년에도 오래도록 다시 오셨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하다. 당신이 내려 놓으실 삶의 무게를 감당키엔 아직도 난 힘겨운듯 어깨가 무겁다.
2004.9.25일. 紫雲山
|